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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아코알라 Mar 11. 2024

디자이너가 글을 읽는 법

십여 년 전에 하상욱이라는 사람이 시 같기도 하고 짤 같기도 한 재밌고 아주 짧은 글들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의 글들은 재밌기도 했지만 뭐라고 콕 찝을 수는 없지만 뭔가 다른 시에서는 느끼지 못해 본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2024년, 그런 그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에 만난 한 전직 디자이너이자 현 유명한 사진작가의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는 책 읽기를 즐기지 않았고, 책 읽는 걸 재밌어하는 사람들을 신기해했다. 그는 정보 검색을 글이 아닌 유튜브 동영상으로 하는 걸 오래전부터 당연해했다. 빛에 예민해서 새하얀 종이를 보거나, 형광등이나 눈부신 햇빛도 즐기지 않았다. 그는 전문적인 사진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냥 찍은 사진들이 모두 감각적이었다. 그가 발로 사진을 찍어도 작품이 되었다. 당연히 그를 찾는 곳이 많았고,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진 강의도 했다.


그에게 내가 물었다. 왜, 과거에 (내 학생이었을 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느냐고,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공부를 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나는 혹시 그에게 난독증이 있어서 그가 책을 멀리했던 것은 아닌지 갑자기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른 것들을 물었다.


- 혹시 글을 읽기가 힘들지는 않아요?  -- 아뇨.

- 그럼 흰 바탕의 글씨를 보기가 힘든가요? -- 네, 맞아요. 한국책들은 특히나 눈이 아프도록 반짝반짝하는 새하아아얀 종이에 글을 인쇄하더라고요. 외국책은 누런 똥종이 같은 건데 말이죠. 그런 너무 하얀 종이가 보고 싶지 않아요.

- 혹시 글을 읽지만 읽고 난 후에 그 내용이 증발해 버린다거나 그런 건 없나요? -- 어... 뭐, 딱히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음... 사실 잘 모르겠네요. 읽은 걸 잘 정리하거나 기억하거나 하는 게 좀 어려운 거 같기도 하고요.

- 언제 글을 읽는 게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 최근에 해외여행을 갔는데 그 왜 입국카드 같은 걸 써야 하잖아요? 거기에 칸칸이 이름, 주소, 방문목적 같은 걸 막 순서대로 써야 하는데 참을 수 없도록 힘든 거예요. 그걸 순서대로 빈칸을 메꿔야 한다는 거가. 다행히 옆에 있던 아내가 다 써줬죠. 아, 저도 그게 왜 그렇게 미치도록 힘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말이죠.

- 글이 뭉탱이로 보인다는 사람들도 있던데 혹시 그렇기도 한가요? -- 사실 디자이너들은 글을 각각의 글자로 인식하지 않아요. 한 덩어리로 인식하죠. 그래야 문장이 어떻게 예쁜 디자인으로 만들어질지가 보이죠. 모든 디자이너들이 아마 다 그럴 걸요. 다들 덩어리로 인식해요. 예쁘게 글이 보이도록 "디자인"해야 하니까요.


이쯤에서 나는 (디자이너였던) 하상욱 시인이 떠올랐다. 시인이 자신은 강박적으로 글의 모양을 맞추려고 한다는 걸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는 주로 이렇게 생겼다.



나는 하상욱 시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니 그가 글을 어떻게 읽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글은 생각과 정보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중요한 매개이지만 다른 어떤 이들에게 글자는 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그림의 일부이기도 한 것 같다.


이 사진작가처럼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엔 분명히 글이 그림을 넘어서 의미를 지닌 문자로써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확증 없는 확신을 나 혼자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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