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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12. 2019

자세히 썰어야 맛있는 건 아는데요

애호박 만두 


사찰요리에는 애호박을 이용한 다양한 메뉴가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많다. 애호박 찜, 애호박 왁저지, 애호박 튀김, 애호박전, 호박국, 애호박볶음, 애호박나물... 주인공이 아닌 날엔 거의 대부분의 메뉴에 피처링으로 참여다. 밥에도, 된장에도, 잡채에도, 국수에도 ft. 애호박. 애호박을 싫어하면 아예 사찰요리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날은 애호박 만두를 배우는 날이었다. 스님이 웃으며 "오늘 호박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게 뭐든 이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애호박 만두에는 다른 게 들어가지 않았다. 오로지 호박의 맛으로 승부한다. 밀과 호박의 조합이라... 어릴 때, 엄마가 곧잘 해주던 칼국수가 생각났다. 



싫다고 왜 말을 못 해

"퍼뜩 뛰가서 호박 한 디 사온나."

엄마가 호박 심부름을 시키는 날의 메뉴는 어김없이 칼국수 아니면 수제비다. 그 둘은 엄마가 제일 자신 있어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엄마는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멸치육수에 수제비를 떠 넣거나 면을 막 집어넣으면서 큰 소리로 나를 부르곤 했다. 분부를 받자와 잽싸게 호박을 대령하면, 엄마는 애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은 칼국수나 수제비를 대접 그득 담아 주었다. 눈물이 찔끔 났다. 지금은 곧잘 먹지만, 어릴 때는 정말 끔찍이도 싫어했다.


일단 음식 이름에 칼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싫었다. 이 세상에 칼밥이란 음식도 없고 칼국이란 음식도 없는데, 왜 하필 음식 이름이 칼국수란 말인가. 칼국수란 이름만 들어도 시퍼런 칼이 먼저 떠올랐다. (어렸을 때 남동생은 비스킷 '엄마손파이'에 실제 엄마손을 갈아 넣는 걸로 오해하고 입에도 대지 않았다. 지금도 먹지 않는다. 이게 다 집안 내력인가 싶기도 하고.) 칼국수를 한 젓가락 뜨면 놀이터 철봉에서 나는 미끄덩한 쇠 비린내가 훅 끼쳤다. "칼 냄새 나서 먹기 싫은데..."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말을 면발과 함께 억지로 삼켰다. 우리 집 상사는 음식 남기는걸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배불러서 밥 한술, 진짜 딱 한술을 남겼다가 남긴 밥알 개수만큼 매를 맞은 적이 있기 때문에, 칼 냄새 운운했다가는 어떤 형벌을 받을지 몰랐다.


칼국수도, 칼국수와 수제비를 합친 칼제비도 이미 충분히 싫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나를 울게 만든 건 칼국수, 혹은 칼제비 위에 수북이 올라가 있는 호박이었다. 내 손으로 사 온 새파랗고 노란 그 호박. 엄마의 칼질은 성격답게 호방했고, 그녀의 칼끝 아래 약 1cm 두께로 가지런히 썰린 호박이 소원 성취를 기원하는 돌탑처럼 수제비 위에서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었다. 호박은 텁텁하고 썼다. 감당하기 어려운 특유의 향과 맛이 있었다. 쇠 비린내에 호박 쓴맛 콤보는 그녀의 시그니처 메뉴인만큼 자주 상에 올랐고, 나는 그때마다 차라리 눈을 감고 호박을 재빨리 삼켰다. 과학백과였나 뭐였나, 어느 책에서 '눈을 감으면 맛이 안 느껴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소용없었다. 호박을 유난히 빨리 삼키는 나를 보고 엄마는 기뻐하며 몇 국자씩 무 리필을 해주었다. 호박의 신이시여, 듣고 계시나요? 제 소원은요...


호박


사랑의 두께는 1cm

애호박은 일단 가늘게 종종 채 썰어 소금을 뿌린 뒤, 물기를 짜고 살짝 볶아 식힌다. 스님의 시연을 보며 '그래 봤자 호박이지.'라는 확신이 있었고, "만두에 호박을 많이 넣을수록 맛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땐, 어릴 때의 호박 탑이 생각나 순간 아찔했다. 혼자 만드는 거였다면 호박 반 공기 반을 넣었겠지만, 여럿이 함께 만들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결과를 말하자면 나는 그날 호박맛을 처음 알았다. 꽤 오랫동안 내 기억을 꽉 움켜쥐고 있던 특유의 텁텁한 향과 쓴맛이 전혀 없었다. 호박소가 그득한 만두는 오히려 깔끔 담백했고, 이에 닿는 호박의 아삭한 식감에 자꾸만 손이 갔다. 한 김 쪄낸 것도, 국물 위에 동동 띄운 것도 모두 너무 맛있었다. 호박 만두는 스님의 말 그대로 호박의 진가였다. 한 시인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고 말한 것처럼, 애호박은 자세히 썰어야 맛있다는 걸 알았다. 호방한 1cm 말고 섬세한 0.3mm로.


그러고 보니 엄마표 칼국수도, 수제비도 먹지 못한 지 벌써 10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서울에 올라와 혼자 산지도 꽤 되었고, "밥 먹자!" 하고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고요한 식탁이 내 삶이 된지도 오래다. 어느 일요일, 티비를 틀고서 <날아라 수퍼보드>나 <달려나 하니> 같은걸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퍼뜩 뛰가서 호박 한디 사온나!"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한낮의 햇살처럼 내 등 뒤로 쏟아지던 그날들이 문득 그립다. 왜 갑자기 1cm 호박이 수북 올라간 엄마표 칼국수가 먹고 싶을까. 내일은 호박을 아주 두껍게 썰어서 칼국수 해 먹어야지. 웬일이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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