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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Oct 20. 2019

나는 요섹남이 싫어요


"거기 남자도 있어요?"

내가 사찰요리를 배우고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된 동네 요가원 원장님의 첫 질문이다(회원 중 한 명을 요리 배우다 마주쳤다). 평생을 무용하며 같은 남성보단 여성들과 가깝게 지내셨을 테고, 지금도 회원의 대다수가 여자인데 원장님이 그런 질문을 하다니 좀 의외였다. 남자의 입장에서 무용과 요리를 놓고 본다면, 진입장벽이 훨씬 더 높은 쪽은 무용일 것 같은데. 남자가 적다는 내 말이 걸렸던건지, 원장님은 아직까지 요리의 현장에 나타나지 않으신다. 가끔 나를 마주치면 "아직도 배워요?"하고 묻곤 하시지만.


이제 많은 분야에서 성역이 없다고야 하지만, 요가 선생님의 염려처럼 아직까지 성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요섹남(요리 잘하는 섹시한 남자)'이란 말만 봐도 그렇다. 그동안 여자가 요리하는 것을 가리켜 그 누구도 '섹시하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우두커니 서서 칼질을 하고, 국의 간을 맞추는 여성의 모습은 오히려 섹시와 최 대척점에 서있는 듯 보인다. 자뭇 여자의 섹시란 가슴골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옷, 짙은 눈 화장과 새빨간 입술, 도발적인 눈빛이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고, 매체에서 소비하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남자들은 칼 잡고 파만 좀 찹찹찹 썰어도 "어머! 섹시해!"라는 찬사를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요리하는 여자 입장에선 좀 배가 아플 일이다. 내가 백날 양파 썰어봐라, 그 누가 나에게 '요섹녀'라는 칭호를 내줄 텐가.



여기 남자 있습니다

사찰요리 수업의 수강생 대부분은 여자, 여자 중에도 4, 50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아무래도 한국사회에서 주방을 차지하고 있는 건 여자의 몫인 경우가 많으니까. 2, 30대는 미미한 존재감만 드러내다가 <나 혼자 산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우먼 박나래 씨가 사찰요리를 배우는 에피소드가 방영된 후로 좀 늘었다. 그 2,30대도 대부분 여자. 그리고 2,3,4,50대 여자들의 틈을 비집고 남자가 있다.


사찰요리를 배우는 남성들은 크게 두 부류다. 1) 요리에 관심이 있어서 2) (요리에 관심 있는) 사랑꾼이라서.

1) 요리에 관심이 있어서

요리 전공자나 자취생. 주로 젊은 남성들. 스님도 감탄할 정도로 요리 실력이 수준급이거나 혹은 그 반대. 요리를 잘 못하는 남성들은 간단한 요리팁에도 열광하고, 리액션도 굉장히 좋은 편이다. "크아아아!" 한 숟갈 먹고는, 마치 월드컵 결승골 넣은 것 같이 포효하는 분도 더러 있다.

2) 사랑꾼이라서

여자 친구를 따라오거나, 혹은 여자 친구가 좋아할 것 같아서 데이트 코스로 요리 수업을 신청했다는 남성들. 아내가 임신 중이라 맛있는 걸 해주고 싶어서 배우러 왔다는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다 설렌다. 주말마다 빼놓지 않고 수업에 나오시는 중년의 남성분도 있다.

"매주마다 열심히 나오시네요!"

"아내가 요리를 못 해. 내가 해줘야지 뭐."

수업 중엔 누구보다 열심히 필기하고, 조그만 떡이라도 아내와 딸에게 맛 보여준다고 알뜰하게 싸가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섹시한 남자는 없습니다

사찰요리를 배우러 오는 남성들을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섹시하다'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물론 사람들마다 이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섹시 포인트가 저마다 다를 테지만, 그들이 보기 드물게 앞치마를 두른 남성이고 단지 요리를 한다고 해서 성적인 매력이 부각되진 않는다.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위하는 모습이 멋있는 거지. 요리하는 남자는 (여성에 비해) 드물고, 그래서 매력적이고, 그 매력이 '섹시하다'라고 표현되는 걸 잘 안다. 그러니 요섹남이란 말은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요리하는 남자가 단지 희소해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요리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고민 없이 시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요리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남성과 여성이 좀 더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발레를 하는 남자, 축구를 하는 여자, 퇴근 후엔 꽃꽂이를 배우는 남자, 주말엔 농구 한 게임 뛰는 여자.


누가 나에게 '요섹녀'칭호를 내줄 거냐고 투덜거렸지만, 실은 요섹녀라는 소리 대신 멋지다는 칭찬을 듣고 싶다. 남자든 여자든 요리하는 사람은 멋지다. 요리하는 사람은 자기 몸에 대한 고찰을 하는 사람이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기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니까. 내 몸이 뜨끈한 국을 원할 때는 시래기와 들깨가루를 넣고 푹 끓여낸 매콤한 전골을, 신선한 야채를 원할 때는 브로콜리와 파프리카를 기름에 가볍게 볶아낸 샐러드 한 접시를 스스로에게 대접할 줄 아는 것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일인지 사람들은 참 쉽게 간과하는 것 같다. 나는 내 몸이 필요로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적절히 대접할 줄 아는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요리 잘하는 남자가 내 이상형인 이유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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