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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28. 2019

계절이 물러가며 인사를 건네듯

봄 향기 가득한 꽃초밥


계절을 살아가는 기쁨

나는 주호 스님의 수업으로 사찰요리를 처음 시작했다.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눈에 가장 처음 보이는 생명체를 어미라고 따른다던데, 주호 스님에 대한 나의 마음도 꼭 그랬다. 난생처음 배우는 요리 수업인 데다, 내 인생 처음으로 가지게 된 요리 선생님이 스님이라니! 가끔 거리나 절에서 스님을 스친 적은 있지만, 불교도가 아니기에 스님과의 본격 커뮤니케이션 역시 처음이었다. 온통 새로움 뿐인 사찰요리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이 끓어 넘쳤다. 어떤 분께 어떤 요리를 배우든 신나고 재밌었겠지만, 주호 스님과의 수업은 정말 즐거웠다.


"지금 산에는 아카시아가 활짝 피었어요. 이리 와서 향 좀 맡아보세요."

"제피는 이때 아니면 떫어져서 먹기가 어려워요. 맛이 어때요?"

스님이 선보이는 메뉴마다 계절이 뚝뚝 묻어났다. 스님이 알려주는 계절은 그동안 내가 감각해오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나에게 계절이란 그저 출퇴근 때 입을 옷이 바뀌고, 냉장고를 채우는 과일 종류가 조금 달라지는 정도였다. 창에 블라인드를 드리운 사무실은 바깥의 풍경과는 관계없이 늘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했고, 한겨울에도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언제든 수박과 딸기를 먹을 수 있었다. 스님이 말하는 계절을 잊고 산지 오래였다. 눈이 먼저 환해지는 꽃 초밥, 몸 깊숙한 곳까지 쌉싸름한 향이 스미는 곰취 쌈밥, 봄을 한 입 베어 문듯한 냉이 만두... 제철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배우며 계절 속에 살아간다는 기쁨을 비로소 느꼈다. 나는 계절을 잊은 게 아니라, 어쩌면 처음부터 몰랐던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봄이 끝나고 슬그머니 여름으로 진입할 무렵, 한층 짙어진 초록으로 무장한 창밖의 가로수를 눈으로 훑으며 수업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스님이 인자한 얼굴로 우리 앞에 섰다. 스님의 인자한 얼굴과 상반되게 내 얼굴은 딱 굳어버렸지만. 앞에 서 있는 분은 주호 스님이 아니었다. "오늘부터 수업을 맡게 된..." 스님이 어디 가셨지? 갑자기 그만 두신 건가? 주호 스님의 행방을 궁금해하느라 앞에 선 스님의 목소리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요리 수업을 진행하는 스님이 분기마다 바뀐다는 것을 그때야 겨우 알게 됐다.  


스님 잃은 설움이 그렇게 클까. 그 뒤로 왠지 수업마다 좀 시큰둥하게 됐고, 주호 스님 말씀이라면 깨알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 부지런히 받아 적던 손가락이 여간해선 움직이지 않았다. 그 무렵의 레시피를 보면 여백에 '주호 스님이 보고 싶다... 너무 재미없다...'라는 메모가 군데군데 있다. 그렇다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주호 스님을 마냥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고, 요리를 배우고 싶긴 하니 수업에는 꾸준히 나갔다. 처음에 '저 스님은 말씀이 너무 많네, 맛있는 메뉴가 별로 없네...'하고 궁싯거리던 마음이 수업이 거듭될수록 차차 줄어들었고, 생겨난 마음의 여백에는 다시금 사찰요리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이 생겨났다. 불 앞에서 다듬고, 썰고, 볶고, 튀기고, 구우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여름이 어떻게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좋은 날 다시 만나요

코끝이 쌀쌀해질 무렵, 정효 스님을 만나게 됐다. 담당 스님이 또 한 번 바뀐 거다. 그 무렵 친구와 수업을 함께 듣고 있었는데, 친구가 정효 스님을 보자마자 픽 웃었다.

"왜 웃어?"

"아니... 저 스님 체구도 작고 힘도 없어 보이는데, 요리한다고 앞에 서 계시니까 왠지 웃겨서. 쓰러지실까 걱정되네."

친구의 표정은 정확히 3초 만에 바뀌었다. 스님의 눈은 우리를 보고 웃고 있는데, 손은 보이지 않는 속도로 칼질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늘 감탄하지만 정효 스님의 칼질은 볼 때마다 예술이다. 나중에 비법을 여쭸더니 "배운 적은 없는데, 칼 잡으니까 잘하더라고요."라고 답하셨다. 타고나신 것으로...)


쌀쌀한 계절에 배우는 사찰요리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깜짝 놀랄 메뉴가 수두룩했다. 고추를 넣고 끓여낸 채소국물은 코가 뻥 뚫릴 만큼 얼큰했고, 사찰식이라 해서 은근히 얕잡아봤던 짬뽕밥은 웬만한 식당보다 훨씬 나았다. 달달한 가을무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무 왁저지, 푹 고아혀끝에서 사르르 녹는 시래기찜... 특히, 여섯 가지뿌리 채소를 넣고 오랜 시간 뭉근히 육근탕은 추운 날씨에 딱 어울리는 별미로 정효 스님의 시그니처 메뉴이기도 했다. 매주마다 먹을 생각에 들떴다.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을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겨울이 그토록 사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정효 스님이 수업을 마치며 "좋은 날 다시 만나요."하고 손을 흔들었을 땐, 서운함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이젠 알았다. 곧 봄과 함께 주호 스님이 돌아온다는 걸. 곰취며 두릅이며 푸릇푸릇한 이파리를 들고선 "이거 보세요."하고 또 멋진 계절을 한 아름 안겨주실 거라는 걸. 그렇게 봄과 여름을 맞이하고 보내고, 어느새 또다시 가을을 맞았다. 물론 정효 스님과 함께. 올해도 육근탕과 시래기찜을 맛있게 먹으며 추운 계절을 든든하게 나겠다고 다짐 중이다.


사찰요리를 배우면서 뭐가 제일 좋은지 꼽는다면 사계절의 매력을 비로소 알 게 된 것, 그리고 계절과 제대로 사랑에 빠진 것일 테다. 사계절 중 봄을 제일 좋아해 일 년 내내 봄이었으면 하고 늘 바랬다. 꽃이 흩날리면 땅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다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꽃잎이 말라 누렇게 색이 바랠 때까지 버리지 못했다. 혼자 봄을 물고 늘어졌다. 빙수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여름의 매력을 찾기 힘들었고, 가을은 언제나 "벌써?" 하는 감탄사와 함께 찾아왔다가 금방 사라졌다. 긴긴 겨울을 봄만 기다리며 끙끙거렸다. 이제는 안다. 계절은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고, 그때마다 놀라운 기쁨을 내게 안겨준다는 것을.


계절이 슬그머니 바뀔 때면 스님들이 인사한다. "좋은 날 다시 만나요." 하고. 계절이 물러가며 내게 건네는 인사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 인사에 웃으며 답할 수 있다. 다가온 계절에 흠뻑 취할 수 있으면 그만이니까, 우린 또다시 만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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