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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Oct 07. 2019

제법 오래된 미래


정관스님은 우리나라 사찰요리의 대가다. 사찰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정관스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수업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우르르 스님을 따라나가 사진도 찍고 사인도 받았는데 "저 스님 유명하신가?"하고 그 모습을 멀거니 서서 지켜보던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정확히 1년 뒤, 내가 제일 먼저 따라나가서 스님과 사진 찍고 팔짱을 끼고 난리를 쳤다).


세계 최정상 셰프들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 시리즈에서 정관스님을 다루기도 했는데, 다큐 덕분인지 스님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스님을 찾고 있다. <셰프의 테이블>에서 정관스님은, 곧 장풍이 나갈 것 같은 절도 있는 손동작으로 독 속에 담긴 간장을 휘저으며 한마디 하신다. "간장 맛의 비결은 장풍입니다." 물론 스님이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고 "... 지금 제가 간장을 담고 있고 간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제가 지금 느끼고 있죠. 그렇다면 제가 지금만 있는 게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내가 있고 미래에도 내가 있을 겁니다. 간장은 떨어질 수가 없죠 생명줄입니다."라고 말했다. 알듯 말 듯 아리송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찰요리의 정수는 간장이구나.



간장 앞에선 긴장이 된다

"집간장 2큰술, 진간장 1큰술 넣고..." 스님의 말씀에

"예? 집간장이요? 진간장이요?" 다급하게 되묻는 나.

사찰요리를 배운 지 어언 2년이 넘어가지만, 고백하자면 아직도 나는 간장 앞에서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간알못(간장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요리를 배울 때마다 이런 상황이 자주 반복된다. 간장이 사찰요리의 중추를 담당하는 만큼, 스님들도 틈날 때마다 간장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신다.

"이 요리에는 무슨 간장을 쓸까요?"

"맛간장은 이렇게 저렇게 만들고, 요렇게 보관하는데, 요기조기에 쓰면 좋고..."


사찰요리에 사용되는 조미료는 단순하다. 소금, 간장, 설탕 끝. 설탕도 아주 가끔 사용하는 걸 감안하면 거의 모든 사찰요리는 소금과 간장, 요 두 가지로 승부를 본다. 소금은 말 그대로 소금인데, 간장으로 들어가면 조금 복잡해진다. 조선간장, 왜간장, 집간장, 진간장, 맛간장, 양조간장... 사찰요리를 배우며 간장의 세계가 그토록 복잡하고 오묘한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간장을 보통 언제 쓰는가? 끓여낸 국의 간을 맞출 때? 나물 무칠 때? 만두나 전을 찍어먹을 양념장을 만들 때? 실은 굳이 간장이 아니어도 될 때가 많다. 내가 그동안 간장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었던 것도, 간장을 대체할 수 있는 여러 가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찰요리는 쓸 수 있는 재료가 상당히 제한적이다. 고기도, 생선도 쓸 수 없으니 재료의 맛에 기댈 수 없는 데다 한 숟가락이면 끝장난다는 굴소스니 액젓이니 하는 것도 안된다. 그뿐인가, 오신채(파, 마늘, 부추, 양파, 달래)도 못 쓰니 요리의 풍미를 끌어올릴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온통 안 되는 것뿐이라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은 사찰요리에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게 바로 간장이다. 간장으로 야채 본연의 맛을 끌어올리고, 요리에 풍미를 더하고, 맛의 균형을 잡는다. 심지어는 색도 맞춘다. 이 모든 걸 간장이 다 해낸다. 그것도 완벽하게.


지난여름 배웠던 간장비빔국수는 양념으로 간장 딱 한 숟갈만 넣고 심심하게 간했는데도 한 그릇 뚝딱 비웠고, 간장으로 만든 샐러드 소스는 의외로 상큼하고 산뜻했다. 다 된 요리에 뭔가가 좀 아쉽다 싶을 때도 간장 한 숟갈이면 금세 해결된다. 급하게 채수가 필요할 땐 생수에 간장 몇 숟갈만 넣어 대체제로 사용할 수 있다. 간장과 함께라면 어떤 재료를 갖다 줘도 마음이 이토록 든든하니, 요리를 할 때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맛있고 훌륭한 간장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간장 맛을 아시나요

간장의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벽화에도 장을 담근 장독대가 등장하고, 신라시대엔 폐백 품목으로 간장과 된장이 등장한다(나 시집갈 때 양조간장 한병들고 "어머니임~"하면 되는 건가.) 그만큼 간장이 귀하고 중요한 대접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토록 귀한 간장이니, 옛사람들은 장 만드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겨 날짜 선택부터 재료 선정, 몸가짐에 이르기까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굴소스도, 라면스프도 없을 때이니 모든 요리에는 간장이 꼭 들어갔을 것이고, 부러 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간장을 섭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간장을 얼마나 먹고 있을까? 어제, 오늘 먹은 음식을 되새기며 '이 메뉴가 짠맛이니까 간장이 들어가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다시 묻는다. 내가 묻는 건 '진짜' 간장이다.


중국에서 유학할 무렵, 머리카락을 염산에 녹여 간장을 만들었다는 뉴스를 봤다. 구두 밑창을 녹여 요플레를 만들었다는 뉴스도 함께. 중국의 기술력에 감탄을 하며 "역시 대륙의 기상은 다르다!"라고 박수를 보내줄 기개는 없었고, 그동안 내 몸에 알게 모르게 들어갔을 각종 유해성분이 걱정됐다. 비스킷도 종이로 만든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고, 머리카락 간장과 구두 밑창 요플레 소식을 접하고 나니 종이 비스킷쯤이야 우습게 여겨졌다. 마침 이상하게 몸도 시름시름 아프던 때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다.


마트에 가면 수많은 간장이 빼곡하고, 개 중에 특출 나게 이름을 휘날리는 간장 상표도 있다. 간장이면 다 같은 간장인 줄 알았다. 마트 한쪽 선반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간장 중에 어느 곳을 고를지 몰라 한참 고민하다가 간장이 간장이겠지, 하고 결국엔 싼 걸 집어 나오곤 했다.


그런데 우리가 봐야 할 건 유명 상표도 아니고, 가격표도 아니다. 뒷면이다. 간장 뒷면을 살피면 '산분해 간장'이라는 표기가 있다. 간장은 충분히 발효해야 하는데, 시장에 내다 팔려면 시간이 곧 돈이 되므로 오랜 발효가 불가해진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염산에 녹인 것처럼, 화학첨가물을 때려 넣고 염산에 녹여 '산분해 간장'이라고 판매한다. 간장이 1%만 들어가고 나머지 99%가 화학첨가물이라도 버젓이 간장이라고 팔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동안 먹어온 간장은 머리카락 간장과 대동소이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매우.


간장 하나로 사찰요리의 맛을 좌우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제대로 만든 간장이라면 짭조름하고 달착지근하고 혀에 착 감기 깊고 풍부한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간장은 원래 그렇다. 우리가 간장보다 더 새카맣게 몰랐을 뿐. 가짜 간장을 가지고 맛을 내려니 안되니까 별별 조미료가 다 필요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식탁에도 간장이 들어간 요리는 수없이 많다. 볶음에도, 조림에도, 구이에도, 찜에도, 튀김에도 간장이 들어간다. 그런데 그중에 진짜 간장은? 내 입에 들어가는 간장이 머리카락 간장과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에이, 그런 거 일일이 따지면 먹을 거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 꼭 있다. 그러면 알면서도 눈 딱 감고 머리카락 간장을 먹어야 할까?


그토록 훌륭했던 과거의 간장이 오늘에는 자본과 힘의 논리에 밀려 이상하고 괴이한 액체로 변신 중이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가 미래에 '간장'이라고 버젓이 믿고 먹는 것은 도대체 어떤 걸까? 과거의 것이 좋고, 오늘의 것이 나쁘다는 판에 박힌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뭐가 중요한지, 왜 중요한지 알고 먹는 것과 모르고 먹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사찰요리를 배울수록 정관스님이 다 제쳐놓고 간장을 이야기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 깨닫게 된다. 스님이 간장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며 타임 리프를 한 것도, 간장을 생명줄이라고 한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부디 미래에도 진짜 간장이 우리의 식탁에 오를 수 있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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