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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Sep 27. 2019

리더 마일리지 적립 중

칼칼한 두부찌개


세계 유명 셰프들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에 출연한 정관스님의 인기 덕분인지, 해가 거듭될수록 사찰요리를 배우러 오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 가까운 중국, 일본부터 베트남, 태국, 터키,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아프리카... 일단 내가 사찰요리를 공부하며 만난 외국인은 이 정도. 전 세계 국가수가 230개쯤 된다는데, 앞으로 꾸준히 배우면 100개국 사람들은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본다.



외국인 받고 스무 살 추가요

외국인과 신라면 하나 함께 끓이는 것도 특별한 일일 텐데 요리, 그것도 사찰요리를 함께 만드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다. 오늘은 네덜란드에서 온 커플과 같이 요리를 하게 됐다. 그들은 이미 스님의 시연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상태(아, 원래 하얗구나). 오늘따라 은행, 연자육, 연잎과 같이 한국인에게낯선 재료가 등장한 데다, 요리 두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야 해서 마음에 부담이 좀 있었다. "우리 못해요."하고, 시작 전부터 겁을 먹고 걱정하는 네덜란드 커플을 향해 씩 웃으며 "우리도 할 수 있어요!"를 외치고는 마음속으로 요리 순서를 그리고 있는데, 뒤늦게 스무 살짜리 소녀가 선글라스를 쓰고 등장했다. 한국인이라 반가운 마음도 잠시, 살면서 처음 칼을 잡아본다는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내뿜으며 선글라스 너머로 나를 빤히 바라보기에 또 씩 웃어버렸다. 아, 내가 힘들 때 웃는구나... 스님이 우리 조를 지나치며 나에게 말했다. "믿고 맡길게요!"


오늘의 메뉴는 연잎밥과 두부찌개. 전체적인 순서를 머릿속으로 짠 뒤, 각자의 할 일을 나눴다. 네덜란드 남성분에게 두부를 먼저 썰어보라고 했더니 칼질을 곧잘 하는 편이라, 고구마나 무를 써는 일도 맡겼다. 여성분은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연자육 다듬는 일을, 칼을 처음 잡는 스무 살은 제일 안전한 표고버섯 채 써는 일을 맡겼다. 시작이다. 다들 잘하고 있는지 체크하면서, "perfect!" "잘 썰었네!"하고 간간이 칭찬도 빠뜨리지 않으면서, 나는 그동안 달군 팬에 은행을 볶고 연잎을 씻고 대추를 썰고 밥물을 잡았다. 손질된 두부에 미리 소금을 뿌려두는 것도 잊지 않고.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사찰요리를 배우면 눈과 손이 정말 빨라질 수밖에 없다. 밥물을 잡고는 조원들이 각자 다듬은 재료를 순서대로 같이 넣으면서, 지금부터 밥을 할 거라고 설명했다. 일단 밥은 올렸고.


그다음은 찌개. 두부를 노릇하게 구운 다음 찌개에 넣는 게 포인트인데(다들 한번 해보세요), 두부를 굽는 건 쉽게 할 수 있으니까 한번 해보라는 뜻에서 스무 살을 불렀다. 스무 살이 밥주걱을 들고 프라이팬을 뒤적거리는 패기를 보여줬지만, 그래 밥주걱도 괜찮아. 네덜란드 커플은 냄비에 무를 깔고, 고추를 썰고, 요리를 낼 그릇을 골라 오는 일을 부탁했다. 밥주걱으로 두부를 굽는 스무 살을 지켜보면서, 나는 찌개 양념을 만들고 밥을 위아래로 뒤적여주었다. 양념을 만든 뒤에는 다 같이 맛보면서 간이 맞는지 합의(?)하고, 구운 두부의 상태를 한번 체크한 후 냄비에 양념과 함께 넣고 불에 올렸다.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네덜란드 남성이 센스 있게 다 쓴 그릇은 바로바로 설거지를 해줘서, 요리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 '치우면서 요리하기'를 맛봤다.


평소에 자신 없어 물 잡기를 늘 다른 사람에게 미뤘던 냄비밥도 알맞게 잘 됐고, 찌개도 외국인이 먹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얼큰했다.(그가 찌개에서 '네덜란드 맛'이 난다고 했는데, 그게 어떤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 스무 살이 밥을 먹다 말고 "와 맛있어요. 마음이 편해요."하고 느릿느릿 이야기했다. 이 언니는 사실 마음이 바빴단다. 혹시 밥이 질까 봐, 찌개가 짤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맛있게 먹고, 마음이 편했다니 다행이지. 다 같이 먹고 나서, 네덜란드 남성과 함께 설거지를 하며 "오늘 설거지 많이 해서 어떡해?"하고 물었더니, "네가 우리를 잘 리드해줬잖아. 고마운 마음에 하는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순간 찡. 여성분도 "처음에 너무 어려워서 못할 줄 알았는데, 리드해줘서 고마워요."하고 인사했다. 그리고 "영어 왜 이렇게 잘하세요?"라는 칭찬까지 날려주었다. 그냥 나는 최대한 많이 알려주고 싶어서 최대한 많이 말한 것뿐.


먼 타국까지 와서 요리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 하나로 도마 앞에 선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유튜브로 'KOREAN FOOD'를 찾아보면 상당수 게시물이 '먹방'이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치킨도 먹고, 족발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이게 요즘의 한국 문화이긴 하지만, 한식의 전부는 아닌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크다. 처음 보는 식재료, 조리법, 맛을 경험하는 이 시간을 통해 한국과 한식에 대한 좋은 기억을 선물하고 싶다. 나 역시 이국을 여행할 때, 그곳 사람들로부터 그런 시간과 기억을 선물 받았던 것처럼.(오해하실까 봐 밝히는데, 많이 말한 것이지 잘 말한 게 아닙니다. 외국인들은 대체로 칭찬에 후하니까요.) 요리가 끝나고 네덜란드 커플이 뒤돌아서서는 나에게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기에, 나도 크게 손을 흔들어 답했다. 마치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신나게 여행하다가 헤어질 때의 기분 같았다. 스무 살은 요리에 재미를 붙였는지 다음에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가랑비 리더십

네덜란드 커플이 오늘 입에 올린 '리더'라는 말이 마음에 줄곧 남았다. 나에게 리더라는 단어의 무게는 꽤 무겁다. 그동안 나는 리더 자질이 0%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리더의 자질, 리더의 책임, 리더의 역할 같은 걸 말하는 콘텐츠가 무수히 넘쳐나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결국 '좋은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거고, 나는 그런 무겁고 어려운 감투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반장을 시킬까 봐 걱정했고, 회사는 물론 크고 작은 모임에서도 구성원 1에 만족했다. 대표나 장을 자처하고 나서는 사람을 보면 경탄했다. 아니, 저렇게 일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고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는 일을 굳이 왜? 하고.


그런데 요리를 하다 보면 리더가 되는 순간을 종종 경험한다. 오늘처럼 외국인과 요리를 하는 경우도 있고, 한국 요리에 대해 외국인 못지않은 생경함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과 하는 경우도 있다. 열 살 남짓한 꼬맹이와 함께 할 때도 있고, '내 말이 곧 법이오'하고 남의 말은 도통 듣지 않는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와 해야 할 때도 있다. "나 잘 못하는데 내가 해야 해?"하고 참여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몫은 생각하지 않고 혼자서 A to Z를 해나가려는 사람도 있다. 여러 가지 태도를 보면서 많이 배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컨트롤 타워'를 맡는 날에는 딱 두 가지만 생각한다. 첫째. 믿고 맡긴다. 둘째. 결과는 다 같이 책임진다. 각자의 역량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일을 알맞게 배분하고, 함께 힘을 합쳐 무언가를 해나간다는 마음이 있으면 전체를 컨트롤하면서도 내 역할에 충분히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꽤 재밌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아마 선뜻 대표나 장을 자처하고 나서는 사람들은 이 재미를 일찍부터 간파했던 거 아닐까. 노래나 춤 실력을 타고 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날 때부터 이마에 '리더'하고 써붙인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리더의 역할도 꾸준히 연습하면 충분히 개발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마치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것처럼, 처음엔 눈물을 삼키며 꾸역꾸역 하지만 조금씩 개수를 늘리다 보면 나중엔 언제 그랬나 싶게 잘하게 되는 날이 있.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요리를 할 때마다 내 안에 리더 마일리지가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다. 나에게 0%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부분을 숨은 복근 발견하듯 만들어가는 재미, 이게 또 인생의 묘미 아니려나(물론 윗몸일으키기는 10년째 세 개를 못 넘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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