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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Oct 28. 2019

요리하는 사람이 바보라서 그러겠어요?

홍고추와 청고추를 썰어 넣은 양념장


귀찮고 힘들어요

밥은 다 됐겠다, 이제 밥에 곁들일 양념장을 만들 차례. 홍고추와 청고추를 다진 뒤, 간장과 기름을 붓고 섞으면 되는 간단한 양념장이다. 스님이 홍고추와 청고추를 각기 따로 채 썰며 물으셨다. "어차피 한 군데 섞을 건데, 왜 따로 채 썰까 싶죠?" 엇, 들켰네. 뜨끔해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스님의 말. "홍고추와 청고추를 같이 썰면, 양념장에 담았을 때 색이 탁해요. 같이 썰면 편한 걸 왜 몰라. 요리하는 사람이 바보라서 그러겠어요?"


그렇지, 요리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지. 그런데도 요리를 하다 보면 굳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귀찮고 번거로운 공정들이 있다. 된장찌개에 넣는 호박이나 감자는 칼로 탁탁 썰어서 넣기보다는 숟가락으로 일일이 떠낸다. 칼이 닿은 것보다 손으로 떠낸 것이 더 맛있다는 이유다. 여러 가지 야채를 볶을 때는 절대 한 번에 볶지 않는다. 고유의 색과 향이 뒤섞이지 않도록 따로 볶아야 하며, 색이 옅은 것부터 짙은 것 순으로 볶는다. 하루는 스님이 브로콜리와 파프리카, 이런저런 야채를 볶아 샐러드 만드는 법을 일러주셨다. 간단하고 맛있을 것 같아서 열심히 필기하는 내게 스님이 물으셨다. "야채 한꺼번에 같이 볶으려고 했죠?" 또 뜨끔. "따로따로 볶아서 식혀야 해요!" 진지한 스님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마음은 샐러드를 만들기도 전인데 반항 모드에 돌입한다. 아, 귀찮을 것 같은데, 간단한 게 전혀 아니잖아...


스님들이 "음식 하면 지혜가 생깁니다"하고 늘 말씀하시는데, 처음엔 그 '지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홍고추와 청고추를 같이 썰어 양념장 색이 탁해진들 얼마나 탁할 것이며, 야채는 색깔까지 맞춰가며 언제 다 볶고, 숟가락으로 떠낸 호박과 칼로 떠낸 호박 맛의 차이를 내 혀가 어떻게 잡아내겠는가. 스님들이 이야기하는 지혜란 아무래도 내 사전에 등재된 지혜와 좀 다른 개념 같다고 생각했다. 내 사전의 지혜란 두 번 일할 것을 한번 일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를 정도로 쉽고 빠르게 끝내는 것인 반면, 사찰요리는 두 번 일할 것을 예닐곱 번 일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나서서 거들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요리를 배우며 어째 지혜 없는 지혜만 느는 느낌이었달까.



요령과 지혜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사찰요리를 배우는 시간이 쌓일수록 몸으로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은근히 탁한 색이 비로소 눈에 보였고, 따로 볶은 야채와 함께 볶은 야채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손으로 떠낸 감자와 호박을 넣은 된장찌개는 훨씬 시원하고 구수했다. 분명 똑같은 레시피로 만들었는데도, 스님이 만든 것이 훨씬 맛있는 경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귀찮아서 무시한 작은 과정들이 요리의 결정적인 부분을 좌우했다. 귀찮음을 감수하고 따로 볶고, 따로 채 썰고, 칼 대신 숟가락을 사용하는 데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스님 말마따나 요리하는 사람이 바보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머리로 듣고 흘리던 말을, 비로소 몸으로 깨달으면서 그동안 '지혜'와 '요령'을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지혜 :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
요령 : 적당히 해 넘기는 잔꾀

로 풀이되어있다. 나라는 사람이 뭐든 빨리하고, 쉽게 하고, 좋은 성과를 내는데 최적화되어 있 요령을 지혜라고 굳게 착각하며 살아온 것이다. 학생 때는 벼락치기로 시험 점수 잘 받는데 급급하고, 회사원이 되어서는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은 업무량을 어떻게든 빨리 마치는데 혈안이 되어서 살았다. 늘 그렇게 바쁘고 쫓기면서 살다 보니, 그런 삶의 태도가 몸에 그대로 배어서 밥 지을 때조차 나도 모르게 자꾸 쉽고, 편하게 할 생각만 했던 것이다. 스님들이 말하는 지혜가 그토록 번거롭고 귀찮게 여겨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음식은 요령이 아닌데, 스님들 중 어느 누구도 "음식 하면 요령이 생깁니다."하고 말씀한 적 없는데.


요즘 밥상에 올라가는 것들은 죄다 요령 투성이다. 요령으로 범벅되어있다. 혀에 착 감기는 맛을 내기 위해 식품첨가물과 각종 색소가 들어간다. 조미료 하나만 있으면 열 가지 재료가 들어간 국물 맛을 뚝딱 재현할 수 있다. 오, 놀라워라! TV에서 유명인이 등장해 가르치는 요리도 마찬가지다. 빨리, 쉽게, 적당히 요리해 '식당에서 파는' 맛을 알려주고 시청자들은 그 레시피에 열광한다.  


두 머슴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우리 전래동화가 있다. 부잣집에서 3년간 머슴을 살던 두 청년이 있었다. 머슴살이를 마치기 하루 전, 주인이 두 머슴을 불러 "내일 아침까지 짚으로 새끼를 꼬아라"하고 명하며 아주 가늘고 길게 꼴 것을 강조한다. 한 머슴은 마지막 날까지 부려먹는다며 화를 내고는 굵고 짧게 새끼를 대충 꼬고, 다른 한 머슴은 주인 말대로 아주 가늘고 길게 새끼를 꼰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다음 날 아침, 주인은 두 머슴을 데리고 엽전이 가득 쌓인 광으로 데려가 "가지고 있는 새끼줄에 엽전을 마음껏 꿰어서 가져가거라."하고 말한다. 새끼를 가늘고 길게 꼰 머슴은 신이 나서 엽전을 꿰고, 굵고 짧게 꼰 머슴은 새끼에 엽전이 들어가지 않아 울상을 짓는 걸로 동화는 끝난다.


여기, 요령으로 만든 요리와 지혜로 만든 요리가 있다. 나는 귀찮고 힘이 좀 들어도, 적당히가 아니라 정확하게 밥을 짓기로 선택했다. 밥상 앞에서 지혜의 태도를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신이 어떤 요리를 선택할지, 나중에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모두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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