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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반지 Oct 27. 2019

뿌리의 힘을 믿어요

육근탕

기세 좋게 들끓던 여름을 지나 어느 사이 가을, 푸르고 싱싱한 잎의 계절이 저물고 이제 뿌리의 계절이다. 온 세상이 여름이 뿜어내는 눈부신 초록에 취해있는 동안, 깊은 땅 속에서 고요히 세를 키워온 무, 토란, 우엉이 드디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시간. 뿌리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찰요리가 바로 육근탕이다.



세상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육근탕은 말 그대로 여섯가지 뿌리를 넣은 탕이다. 우엉, 당근, 무, 토란, 연근, 감자를 넣고 오랜 시간 푹 고아내 우러나온 달착지근한 진액을 먹는다. 재료를 쩨쩨하게 썰어 넣는 게 아니라, 통으로 큼직큼직하게 썰어 뼈를 고듯이 우리는게 육근탕의 핵심 비법으로, 정효 스님의 시그니처 메뉴이기도 하다.


처음 육근탕을 배운 건 지난해, 어느 추운 날이었다. 정효 스님이 늘 입버릇처럼 말을 꺼내시던 육근탕을 드디어 배운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들뜬 나와는 다르게, 그날의 스님은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숙연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스님은 '용맹정진' 마지막 날에 참가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고 강의하러 달려왔다고 했다. 용맹정진은 스님들이 일주일 동안 이부자리를 펴지 않고 꼬박 앉아하는 수행으로, 극한의 수행법 중 하나이다. 너무 고된 나머지, 화장실에 빠지는 이도 있고 밥을 먹다가 그대로 잠들어 발우(스님의 밥그릇)에 코를 박는 이도 있단다.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자고 한 자리에 앉아있으면 잇몸이 부어서 두부도 못 씹을 지경이 되는데, 정효 스님이 육근탕바로 그때 먹는 스님들의 수행식이라고 알려주셨다.

"세상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토록 처절하게 수행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경건해져요." 이 말을 하는 스님의 눈가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두부도 못 씹을 정도로 시뻘겋게 부은 잇몸을 떠올려봤다. 그렇게 처절하게 나를 내던져서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내 마음도 조금 떨렸다.



고요히, 성실히, 튼튼히 

이번 가을도 어김없이 정효 스님의 육근탕과 함께다. 작년에 이어 육근탕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더 들을 수 있었다. 정효 스님이 어린 나이에 출가했을 때, 절에 계신 노스님이 힘들게 수행하는 스님들을 위해 개발한 메뉴가 바로 육근탕이라고. 노스님과 살던 절 이름만 대도 다른 스님들이 "아, 육근탕."하고 이야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 어렸던 스님은 노스님을 도와 가마솥을 저어가며 하루를 꼬박 야채를 고았고, 그런 시간이 켜켜이 쌓여 육근탕이 정효 스님의 시그니처 메뉴가 된 것이다. 육근탕 강의가 있는 날엔, 여느 때와 달리 정효 스님의 표정이 유독 엄숙하고 차분하다. 수행하는 스님들을 위해 뜨거운 가마솥을 휘젓던, 잠을 못 자고 가만히 앉아 고된 시간을 견디던, 수행하는 스님들을 바라보며 벅찬 마음에 눈물짓던 정효 스님의 시간이 한 그릇 탕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육근탕은 어느 때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짓는 음식,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이들에게 생명 그 자체인 음식이다. 땅에너지를 가득 안은 뿌리란 뿌리는 다 넣고, 정성이란 정성도 죄다 넣어서 그렇게 오랜 시간 고아내는 음식이다. 한 그릇 훌훌 마시고, 세상에 너의 뿌리를 내리라고, 마침내 흔들림 없는 뿌리가 되라고 소리 없는 응원을 담뿍 담아서.


가만히 돌아보면 세상의 모든 일은 뿌리가 한다. 싹을 틔워 올리고 꽃을 피워내는 일 모두 뿌리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뿌리를 자주 잊었다. 찬란한 꽃잎과 싱싱한 잎사귀에 취해. 세상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처절하게 수행하는 이들처럼, 뿌리도 알아주는 이 아랑곳 않고 매일을 고요히 성실히 튼튼히 자라나고 있다. 어느 누군가가 세상의 꽃이고 잎이라면 누군가는 말없이 뿌리의 몫을 감당하고 있다.


뿌리를 먹으며 잊었던 뿌리를 비로소 생각하는 계절이다. 세상의 뿌리 같은 이들이, 뿌리를 먹으며 기운내기를. 나 역시 고요히 나의 뿌리를 내릴 수 있기를, 흔들림 없는 뿌리가 되기를. 해마다 돌아오는 뿌리의 시간이 반갑고, 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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