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와 소재 정하기는 본격적인 글쓰기에 앞선 단계다. 지난 편 내용이었던 소재(글감 모으기)에 이어 오늘은 주제, 즉 메시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글은 쓴 사람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얼마나 깊이 알고 있으며,
어떤 것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드러내는 겁니다.
- 유시민, <표현의 기술> -
유시민 작가는 ‘세상을 더 좋게 바꾸는 문제에 대하여 사람들과 이야기’ 하기 위해 글을 쓴다. 유 작가는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주제를 확정하고 관련 자료를 찾으며 글을 구상한다.
유 작가는 그의 책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글쓰기의 세 가지 규칙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취향과 고백과 주장을 구별한다.
주장은 반드시 논증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한다.
‘여론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기 위해 ‘주제’에 집중하는 유 작가의 글쓰기는 날카로운 논리로 주장을 펼치는 유 작가를 닮았다.
‘이성적 사고’와 ‘논리적 추론’으로 무장한 유시민 작가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 집중’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엇을 쓰고 있는지 헷갈려서 막연하게 흘러갈 할 때가 많다.
재료(글감) 자체의 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거기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마법’이라고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처럼, 예상치 못한 사건, 누군가의 인상 깊은 말과 행동, 책 속의 문구 등 일상에서 관찰되는 모든 것들을 그때 그때 메모해 두었다가, 써야 할 때 꺼내면 뭔가 떠오를 때가 있다. 잡동사니 같았던 글감들 사이에서 ‘맥락’이 발견되는 순간, ‘주제’가 ‘마법’처럼 발현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무엇이 내게 이로운지 생각하기에 앞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기술만으로 쓴 글은 누구의 마음에도 안착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질 뿐이다.
-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글에는 글쓴이의 인격이 담겨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지문처럼 고유하게 글 속으로 스며든다. 월등한 글솜씨로 당장은 감출 수 있어도 영원히 가릴 수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의 됨됨이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며, 타인을 연민과 관용으로 대할 수 있을 때 그런 균형잡힌 글도 쓸 수 있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타인을 조롱하려는 본능을 드러내면 다른 모든 이의 삶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승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 메릴 스트립의 2017년 골든글러브 시상식 수상소감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 주인공인 사대부 여성 고애신은 힘이 없는 글 대신 총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면서 의병활동에 투신한다. 이에 고애신의 정혼자인 김희성은 “글도 힘이 있소 누군가는 기록해야 하오. 애국도, 매국도, 모두 기록해야 하오. 그대는 총포로 하시오. 내가 기록해주겠소”라고 답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다. 물리적 폭력만큼 글도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펜이 정말 칼보다 강하다면, 아니, 최소한 칼만큼 힘이 있다면 작가는 쓴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 무사가 검술 실력을 뽐내며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 않듯, 펜을 쥔 손 역시 신중해야 한다.
‘소재’ 편에서 손가락에 가시가 박혔을 때의 아픔도 글이 되지만, 교통사고로 팔다리를 잃은 사람의 고통을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우리의 일상은 무엇이든 글감으로 존중받지만, 글의 가치는 작가가 증명해야 한다. 나 혼자 만족하면 그만인 일기가 아니라 누군가와 소통하는 글이 되려면 ‘무사도(武士道)’ 못지않은 ‘문사도(文士道)’를 지켜야 한다.
글감 모으기, 구성하기, 문장 쓰기, 퇴고 과정에는 나름의 테크닉이 따르지만, 주제 선정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주제는 곧 작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므로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발견된다.
공공기관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근무를 했었다. 조직 구성원 중에는 경력단절 여성으로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선택하게 된 저마다의 이유에는 관심없이 ‘비정규직’ 신세를 벗어나려면 자기 계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도 있었다.
사회학자인 오찬호 교수는 차마 들키지 말아야 할 속물적 욕구를 당당히 드러내는 대담함은 상대가 만만하기 때문이며, 그들은 본인이 이 차별의 공기를 제공한 주범인 걸 부정한다고 진단했다.
약자에게 가혹한 세상을 원망했다. 그대들의 평소 인식이 얼마나 차별적이었는지를 깨닫고 부끄럽길 바라며 글을 썼다. 미국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말처럼 ‘자신이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발할 목적으로 쓴 글이었다.
그 글을 읽은 친구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글 속에 등장하는 갑질의 주인공들이 더 불쌍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펜’으로 되갚아 주고 싶었다. 무사는 칼을 ‘사적 복수’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듯, 작가가 ‘펜’으로 분풀이하는 것 역시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란 것을 몰랐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가 겪은 차별’은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36%가 비정규직인 요즘 시대에 공감을 얻을만한 글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당신들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싶다’는 속내가 불쾌감을 준 것이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개인 원한 해결’이라는 불순한 의도를 사회비평으로 교묘하게 포장해도 들통은 난다. 글재주가 뛰어나도 피할 수 없다.
유시민 작가는 이와 관련하여 중국집에서 불친절한 대접을 받은 후 앙갚음 칼럼을 쓴 한 기자를 예로 들었다.
해당 글은 ‘을질도 갑질만큼 문제다.’는 주제를 논리적으로 풀어낸, 잘 쓴 글이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해볼 만한 주제를 명확하게 기술한 글이었지만,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그래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 거야’라는 본심은 가릴 수 없었다.
손석희 앵커는 2019년 9월 25일자 앵커브리핑에서 '칼잡이의 칼에는 눈이 없다'는 메세지를 전했다.
무사가 휘두르면 피를 부르지만, 요리사가 쥐면 향기로워지는 물건 '칼'
모두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는 그 칼로 세상을 험악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향기롭게 만들 것인가.
펜잡이의 펜에도 눈이 없다.
손에 쥔 펜으로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가, 이롭게 할 것인가.
선택은 펜잡이의 몫이다.
오늘도 품격 있는 펜잡이의 적정글쓰기 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