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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이야기

마음이 깨어나던 순간,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시 쓴다.

by 정안


인생의 첫 기억은 깨진 유리창 앞에 서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젊은 엄마와 아빠가 다투고 남은 자리에 대여섯 살의 어린 내가 울지도 않고 가만히 있다. 울다가 쓰러져 잠든 엄마의 등을 쓰다듬고, 동생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씨씨티비처럼 멀리서 집안의 풍경을 비추는 기억이다. 사건 현장에 대한 기록으로 오래도록 돌려본 장면. 뭉개진 화면 속에 나는 표정도 감정도 없다. 그건 아주 오래도록 나의 일이지만 남의 일인 기억이 되었다.


“내 인생은 잘못되었어. 나는 항상 불행할 거야. 진짜 나를 알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나는 혼자야.”


생의 첫 기억과 함께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만트라. 행복하기 위해 좋은 딸, 좋은 친구, 좋은 연인이 되기 위해 애썼지만 그 서사의 끝은 비참할 거라는 걸 확신했다. 그게 나의 정체성이자 자아였다. 내 인생은 늘 불행할 거라는 강력한 믿음은 행복은 불안하게, 불행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선해 선생님과 아주 오래, 느리게 내 자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바라보았다.


“내 인생은 잘못되었어. 나는 항상 불행할 거야. 진짜 나를 알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나는 혼자야.”


더 이상 다치고 싶지 않아서 어린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예측가능한 불행한 삶을 믿으면 더 기대하거나 다치지 않을 것 같았으므로. 살기 위해 불행을 신앙으로 삼았다.

생의 첫 기억으로 돌아가고, 의식의 바닥으로 내려가며 발견한 건.


‘내’가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바꿀 수 있는 것도 나 아닐까?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나라는 것이다. 나의 하위자아가 만든 단 하나의 이야기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중간자아를 지탱해 그럴싸한 삶을 이어나가다가도, 하위 자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함정처럼 나를 빠뜨렸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므로 지금 이 행복이, 나의 성취가 진실일리가 없다고.


분명 어린 나에게는 “내 인생은 잘못되었어. 나는 항상 불행할 거야. 진짜 나를 알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나는 혼자야.”라는 이야기가 유효했다. 그러므로 노력해야 하고 나를 가꾸어야 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동인이었다.



지금도 그래?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자아로만은 살 수가 없구나,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의식과 현실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구나.


나의 서사는 누군가 부여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었다. 삶은 고통이라는 서사 말고, 나의 자아가 새로 쓸 이야기가 필요했다.


‘고통’이라고 부르면 그 안에 담긴 것들이 덩어리가 된다. 이건 나의 이야기, 나의 서사다.
2024.05.03.


내가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이야기라서 내가 바꿀 수 있다고 깨닫자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가정환경이나 나의 기질 때문에 당연히 부여받은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사실 내 인생은 내가 쓰는 이야기라니. 이야기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그렇게 고통의 서사에 감사와 안녕을 고하고 새 이야기를 쓰기로 다짐했다. 하위자아가 느꼈던 공포와 절박함을 쓰다듬어주고, 안전해진 나의 세상을 보여주었다. 다름 아닌 내가 스스로 나의 세상을 만들어왔다는 걸 어린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듯,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는 책을 좋아하고, 식물을 좋아하고, 나의 공간을 꾸리고, 좋아하는 글을 써가고, 독립된 존재로 생존하는 어른이 된다고. 너의 좋은 점들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줄 거라고.





내 인생을 오염서사로 끝나게 두지 않겠다.




김지수 작가는 말했다. 결국 내가 나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난 스스로에게 다정하고 튼튼한 서사를 써주고 싶다. 그러니까 그렇게 세상을 보고, 그렇게 살고 싶다. 내 이야기를 스스로 쓸 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의 자아는 스스로의 예언자가 되었다. 하위자아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도 않고, 그 때문에 고꾸라지지도 않는다. 하위자아의 역동을 바라보고 중간자아의 영역에서 내 삶의 조타를 잡는다.


이제는 믿는다.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는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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