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주말마다 수백 km를 운전하나
그간 꾸역꾸역 목울대로 넘어 삼켰던 눈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드러나는 순간은 오랜만에 마주한 바닷가 앞이다. 해결하지도 못할 문제에 버둥대느라 풍경에 듬뿍 빠지지 못하는 것은 고뇌를 쓸어갈 준비가 된 바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오늘의 내 목적지는 400km 거리의 해남이다.
손도장만 찍고 돌아서지 말 것
해남은 땅끝 전망대로 유명하긴 하지만 땅끝마을에 손도장만 찍고는 후다닥 돌아 나가는 사람들이 놓쳐버린 것들이 많다. 그 중에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로 꼽히는 해남 중리마을의 낙조도 있다. 해질 무렵 땅끝마을을 향해 77번 해안선 국도를 달리다 보면 가던 길을 되돌아서게 하는 낙조를 만난다.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니 서쪽 하늘이 시시각각 붉은 색의 농도가 달라지는 기교를 부린다. 수줍게 떨어져 있던 죽도와 증도 두 섬이 이내 발갛게 물들자 그 사이로 해가 고꾸라진다. 세상 일 다 내려놓게 하는 일몰이다. 마치 영화 <마션>의 맷 데이먼처럼 화성에 떨어진 듯한 착각을 주는, 인간계가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이다. 배낭을 무겁게 꾸려서 다행이었다. 넘어진 김에 우는 것처럼 '옳다쿠나' 하고 털썩 모래톱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중리마을은 바다를 향해 납작 엎드린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담장에는 향긋한 등나무와 선인장이 서 있고, 넝쿨이 작고 예쁜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하루 두 번 바닷길이 열리면 사람들은 조개와 고둥, 게를 줍는다. 촌스러운 서울 것의 눈으로는 검은 뻘 때문에 무엇이 바지락인지 조개인지 당췌 알 수 없다. 이 통을 언제 채우나 싶은데, 반세기 동안 이 일을 해온 주민들은 막 주워 담아도 어느새 한 통을 가득 채운다. 오늘은 이걸로 바지락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지!
홀로 바닷가에 텐트를 펴는 내게 주민들은 내게 김치와 수고롭게 잡은 바지락 한 무더기를 안겨준다.
“한번 잡숴봐.”
"서울서 왔어?"
"아이고, 아가씨가 대단하네. 혼자 캠핑을 다니고."
"먹을 건 좀 있어?"
하지만 바지락을 준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혹은 나 홀로 캠핑하는 것이 불안했는지 툇마루 저녁 식사에 이방인을 초대한 마을 주민들과는 밤그늘이 아주 늦어져서야 작별인사를 했다.
주민들이 직접 담갔다는 알싸한 총각무와 막걸리 맛에 취한 것일까. 침낭에 들어가도 취기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안되겠다. 좀 더 걸어야겠다. 다시 별을 보며 모래톱을 걷기 시작했다. 어선의 불빛이 밝다. 멀리서 흔들리는 후레쉬 불빛이 보인다. 내 텐트 주변이다. 덜컥 겁이 난다. 혼자 바닷가에 있는 내게 누가 온 거지.
"괜찮아요?"
후레쉬의 주인공은 '여자 혼자 아무래도 걱정된다고, 괜찮으면 비어있는 딸 방에 와서 자라'는 말을 전하러 온 아주머니의 것이었다. 침낭에 누워 다시 예감했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아주 오래 가슴앓이를 할 것임을. 조용한 마을에선 인심의 잔향이 더 오래 퍼지는 법이니까. 해남 땅끝마을의 떠들썩함과 송호해수욕장의 상혼이 싫은 사람은 중리마을의 따사로운 고즈넉함에 안겨보는 것도 좋겠다.
대충 가서 뭘 해도 실패를 모르는 여행지들이 있다. 반면에 권태로운 연인에게서처럼 굳이 장점을 뽑아내야 하는 여행지도 있다. 마주앉은 이들이 쓸데 없는 말로 생채기를 내거나, 취한 이들로 시끄러운 캠핑장에서 마음 같지 않은 휴식을 억지로 취해야 할 때도 있다. 하산길에 혼술이라도 할라치면 또 어떤가. 얼굴 불콰한 사람들이 오지랖 넓게 시비를 건다. "왜 아가씨 혼자 와서 외로이 술을 마시고 있을까. 사진 한 장 찍어드릴까? 안주도 다 남기셨네."
혼자 떠나는 여행엔 물론 이런 불안함도 존재하지만, 중리마을 아주머니처럼 친절한 로컬을 만나거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부산하게 찾아 다니다 보면 쉽사리 불안이 씻겨나간다. 혼술을 해도 이것저것 묻지 않는 적당한 거리의 심야 식당, 셔터 소리 말고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작은 책방,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등대처럼 비추는 좋은 취향의 주인이 운영하는 술집, 또는 100%의 솥밥을 만난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해남에서 유명하다는 솥밥집. 혼자 온 여행자가 별로 없는 식당 안. 20분 전 전화로 미리 주문한 솥밥이 이마를 열었다. 잔뜩 팽창한 채 뜨거운 열기를 품은 밥알들이 지친 혓바닥을 이리저리 구르며 혀를 찜질하니 찬바람에 흔들리던 몸이 방금 닻 내린 배처럼 나부낌을 멈춘다. 그리고 나면 비닐하우스를 통째로 옮겨온 듯 산처럼 쌓인 쌈채소와의 고독한 결투가 시작된다.
불고기나 제육, 보쌈고기는 고명일 뿐. 두서너 종류의 쌈에 견과류 품은 강된장을 올려 입이 미어지게 집어넣고 입가로 빠져나와 다른 길을 모색하는 채소까지 다 입속으로 잡아넣고 한참을 우적거리며 씹다 보니 전날 400km를 운전했던 피곤함이나 재능넘치는 후배에 대한 질투 같은 것은 <어벤져스>의 블립 현상처럼 사라져버린다. 뜨거운 솥밥을 품은 나무뚜껑이 뜨거운 머리를 연 채 이제 누룽지로 날 유혹한다.
사람들은 반짝 멋진 풍경을 보러 수백 km를 운전해서 가는 의미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하지만 100%의 솥밥으로 영혼을 치유하거나 조용한 갯마을에서 뜨거운 인심을 발견하거나, 민박집 벽에 쓰인 낙서 한 줄에 마음의 생채기가 스르르 아무는 경험을 해본 이라면 안다. 뚜벅뚜벅 걸어서 그 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그 풍경을 보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가와 타지인을 곤경에서 구해내는 이웃을 만난 나는 책상머리에만 있던 나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 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김남주의 시가 고향인 해남이 무늬만 요란한 관광지로 격하되는 것을 미리 경계하는 듯하다. 중리마을의 낙조와 넉넉한 달마산, 반찬을 건네주던 사람들. 땅끝에서 만난 많은 호위무사들은 나를 따뜻이 안아주었다.
해남, 끝인줄 알았더니 시작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