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정의 백설기 May 17. 2018

새똥 두 번 맞은 여자

만남과 새똥 사이의 역학 관계

국내 유일 '새똥 조심' 전도사 
어학사전 상 우연은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을 뜻한다. 가수 유연숙의 노래 ‘우연과 필연’엔 ‘우린 우연히 우연히 만났네, 비 오는 날 거리에서/하지만 그건 필연이었어/나는 언제부턴가 그곳에서 비가 내리길 간절히 기도했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하지만 이 가사야말로 기가 막힌 우연의 중첩이 아닌가. 비가 오는 우연 하나, 그 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우연 하나, 이 두 개의 우연이 겹쳐야 가능한 낮은 퍼센티지의 일이니까. 비 내리는 골목길, 사랑하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길 기도하며 서 있는 누군가의 서정을 내가 이해할 리 만무하다. 40 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맞은 소말리아만큼이나 말라버린 지 오래인 연애세포의 지배를 받는 몸뚱이니까 말이다. 

내게도 자잘한 우연은 있다. 계단을 오를 때 ‘천장을 주의하시오’라는 표지판을 분명히 보았지만 늘 이마를 박는 타입에 속한다. 남들은 잘만 걸어가는 평지에서 작은 지우개만한 턱만 만나도, 걸려 넘어지는 스타일이다. 말하자면 늘 웃다가 뒤통수를 벽에 찧는 여자 축에 속한 달까. 늘 하잘것 없는 자잘한 에피소드를 양산하는 우연들뿐,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첫사랑과 우연히 재회해 결혼에 골인했다거나, 전 연인을 클라이언트로 만나 다시 인연이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우연 따윈 내게 없다.
그런 내게 ‘우연’이라고 할 만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은 살면서 두 번이나 새똥을 맞은 일 정도일까? 첫 번째 사건은 중학교 등교 길에서 일어났다. 신호 때문에 정차했던 아빠 차에서 우연히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내 정수리에 둔탁하게 내려 꽂히던 그 불쾌하고도 낯선 감각. ‘설마 새똥인가’ 하는 합리적 의심은 풀색과 흰색이 섞인 정체불명의 물질을 확인하면서 현실로 확인되었다. 그 누구에게 말해도 “에이 거짓말~”이라며 그 아무도 믿지 않는 일명 ‘아웃 윈도우 새똥 사건’이다.  


두 번째로 새똥을 맞은 건 고 1 당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공고 학생회장 오빠와 어깨를 마주 하고 으슥한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모두가 가요제 무대 위의 ‘터보’  커버댄스에 취해 있던 그때 학교 뒷산에서 삐삐 번호를 내 손에 쥐어주던 그는 늘 운동화를 꺾어 신고, 멋진 각도로 침을 뱉을 줄 알았으며, 쇼바를 잔뜩 올린 액시브 바이크를 학교 앞에 끌고 오곤 했다. 그러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도 불경시 하던 ‘유교 소녀’ 나를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배려해주던 자상한 오빠이기도 했다. 

하필 그와의 두 번째 데이트에서 마치 데자뷰처럼 머리에 또 둔탁한 통각이 느껴지다니. 다만 다른 것은 분변의 온도였다. 첫 번째 그것은 비교적 높이 날던 새가 실례를 했는지 낙하 높이와 비례할 만큼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학생회장 오빠와의 데이트를 방해한 두 번째 낙하물의 온도는 저공 비행하던 새의 그것이었는지 막 나온 찐빵처럼 아주 뜨거웠다. 온도는 달랐지만 정수리에 와 닿는 익숙한 통각은 그대로였다. 왜 한국의 새들은 내 정수리를 스텔스 전투기의 타깃처럼 정확하게 꿰고 있는가. 방귀가 잦으면 변이 되듯, 우연도 쌓이면 필연이 되는 걸까. 두 번이나 새똥을 맞은 내게 왜 로또 당첨 같은 행운은 필연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이제 새똥 대신 다른 우연을.. 

연예계 절친으로 알려진 우가우가패밀리의 멤버 박형식은 “우리가 그때 그 게임을 같이 안 했으면 못 만났을까?”라는 최우식의 말에 “아냐, 우린 어떻게든 만났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살면서 내 인간관계는 진학과 취업, 각자의 결혼과 출산 등 생의 발달단계를 거치고, 뜻하지 않은 귀인 및 빌런과 조우하며 많이 조각나고 빗나갔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만난 사건과 사람들 덕에 새로운 조각들로 새롭게 구성됐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하자’던 칠공주 멤버들의 맹세는 중학교 졸업과 함께 일찌기 끝이 났고, 함께 주말 클럽까지 다니던 친한 선배는 나 모르게 뒷담화를 일삼던 최종 병기 빌런임이 드러났으며, 바짝 마른 입술로 “너 없으면 못 산다”고 울며 불며 매달리던 연인들 역시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나풀나풀 날아갔다. 서핑을 좋아하던 무기 로비스트, 물 속에서 날 구해준 다이버 선생님, 기가 막히게 다트를 잘 던지던 유튜버. 수많은 우연을 가장해 만났던 전 남친들과는 때론 우습게, 때론 가소롭게,  때론 아프게 끝이 났다. 내게 남은 이들 가운데 내가 ‘어떻게든 만났을’ 필연이라고 부를 만한 인연이 남아 있는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잦은 새똥을 맞는 일은 이제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 루틴을 벗어나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도 적어졌다. 반가움도 놀라움도 이젠 잘 겪을 일 없는 감정이다. 사물과 사람 사이 연애와 이별도, 사건과 갈등 사이 관계도 이젠 뭐든 충분히 예상하고 겪었던 딱 그만큼 일어난다.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뭔가를 기대하기엔 너무 세상을 많이 산 것일까, 아니면 이제 아무리 쥐어짜도 감성 한 방울 안 나오는 건어물녀 계의 암모나이트가 된 것일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도 0.001 초 단위로 나누면 멈춰진 이미지의 조합이다. 노트북에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여러 엄청난 순간의 우연이 만나 집약된 순간이 아닐까. 유튜브를 열지 않았다면 일주일 전 채널을 개설한 후배의 영상을 보며 자괴감에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이며, 친구와의 약속이 딜레이되어 카페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노트북을 꺼낼 일도 없었을 것이고 카페에 들어오기 전, 만약 내가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내 앞에서 딱 바나나크림파이가 동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비극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오늘 아침 내가 눈을 뜬 것도 우주 속 엄청난 우연의 수의 조합이다. 그러니 내게 오고 있는 필연의 에너지도 아직 사우론의 불꽃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고 치자. 그래서 난 오늘도 눈을 감고 오늘치의 우연을 기다려본다. 자, 새똥 빼고 뭐든 와라.



이전 03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