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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정의 백설기 Oct 24. 2021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사람과 사람 사이엔 어떤 다리가 놓여야 할까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좋아서 하는 밴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자니?"
"...."
"달이 너무 예뻐서 보내" 
"...."
'1'이 사라진 자리엔 사진에 대한 감상 대신 상대의 침묵만 남는다. 아, 내가 그 유명한 구남친 '자니' 공격을 한 '구여친'이 된 건가. 
 

불을 꺼도 밝은 달무리, 가지런한 치열의 양떼 구름, 흐드러지게 핀 꽃무릇을 보면 '좋아서 하는 밴드'도 아닌데,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싶어진다. 오늘은 그 대상이, 다시 잘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구남친이었다. 연인의 관심을 모으고 모아 매번 모래성을 쌓지만 '굳건한 애정'이라는 생명수를 붓지 않은 흙은 금방 금방 허물어졌다. 그래서 내 관계의 성은 늘 쉽게 허물어지는 편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고 사랑함은 뭔가를 해달라고 요구하고, 관심을 억지로 그러모으고, 나를 방목하지 말아달라고 칭얼거리는 게 아니었다. 대신, 나와 내 앞에 좋은 것이 흘러 넘쳐서, 그것을 함께 보고, 사진이라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사랑이었다. 아, 나는 그런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떤 시인이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라고 쓴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1'이 사라진 액정 화면을 끄고 배낭을 챙겨본다. 그래, 사랑 아니면 여행이지. 
 


구 여친 공격을 감행한 흑역사를 잊기 위해 다음 날, 캠핑 배낭을 배에 싣는다. 코로나 시국부터는 인파가 적은 섬 여행을 주로 하는 편이다. 요즘은 다리로 연결되는 섬이 많아졌다. "섬이 섬 다워야지"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섬 생활은 편리해지고, 관광객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만큼 섬 특유의 정서를 잃고 상업적으로 변하거나 외지인을 기피하는 주민들도 많아졌다. 
"방은 필요없수?" "차는 빌렸어?" 목소리 거친 호객꾼들이 여행에 대한 내 한가한 걱정을 깨버린다. 어느새 조용한 항구는 짐을 나르는 전동 카트로 북적북적한다. 고즈넉한 갯마을을 상상하고 도착한 곳에서 바닷가를 곁에 두고 사는 사람들의 떠들썩하고 거친 성정을 맞닥뜨리니 ‘아, 사람 사는 게 이런 거였지’ 하고 정신이 번쩍 든다. 배에 오르면서 가졌던 센티멘털한 감상이 건강한 어촌의 일상으로 대체되는 순간이다. 


어렵게 한 부탁에 '찐하게' 도움을 주는 섬 사람들 
호객꾼의 차를 타고 도착한 마을에는 10여 개의 소박한 민박집이 있지만 주변엔 라면을 살 만한 슈퍼마켓도 없다. 작은 불편쯤은 감수할 수 있는 인내를 지닌 자들만 머무르라는 뜻일까. 사실 섬 여행은 대부분 불편하다. 섬내 이동 수단도 여의치 않고, 육지에 비해 물가는 어쩔 수 없이 비싸며, 갑작스런 풍랑으로 발이 묶이기 일쑤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드린 부탁에 '찐하게' 도움을 주고, 먹던 밥상에 숟가락만 놓으면 된다며 섬 밥상을 한상 차려 내오는 할머니도 있으며, 배에서 함께 내린 주민들과 섬에서 종일 기분 좋은 재회를 할 때도 있다. 

짐을 풀고 산길로 들어섰다. 매번 가보지 않은 정상을 오늘은 기필코 밟으리라. 산에 올라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처럼 구남친의 이름을 외치고 다 털어버려야지. 마당바위에서 혼자 밤을 까먹는, 어딘가 어두운 낯빛의 남자에게 길을 물었다. 등산길에는 덩치 큰 음습한 기운의 그와 나뿐. 게다가 여긴 외딴 섬. 어쩐지 두렵다. "지금 가면 정상까지 해지기 전에 갈 수 있을까요?" 어두운 기운의 사내는 그러나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정겨운 사투리로 투박하지만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다. 섬과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내 마음만 괜찮지 않았다. 

산을 내려왔는데도 아직 해는 수평선 언저리에 걸려 있다. 섬에서는 원래 시간이 느리게 간다. 다리가 놓여도, 쾌속선으로 눈 깜짝할 새에 가 닿는다 해도, 섬은 섬이다. 낙원은 쉬 지루해지는 법이지만 바람 많고, 돌 많은 섬마을은 벗기고 또 벗겨봐도 늘 새롭다. 사람은 아무것도 안 했으나 바다와 땅과 바람이 낙원을 만들어 놓았다. 곰솔 끝에 걸리는 별, 갯바람이 부는 영롱한 모래 해안. 아무렇지 않은 섬 사람들의 일상이 내륙 사람들에게는 진귀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육지에서의 말랑말랑한 걱정일랑 툭툭 털어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섬은 수다의 볼륨을 저절로 줄일 수밖에 없는 호젓하고 낙낙한 섬만의 정서를 지녔다. 배가 끊어지면 육지에서의 걱정거리도 끊어진다. 섬에선 일단 자 봐야 한다. 당일치기로는 그 섬의 매력을 잘 알 수 없다. 섬에서 자봐야 비로소 섬에서 보는 일몰이 육지와 다르다는 것, 저녁이 되며 짙어지는 산그늘이 섬에선 유독 빨리 드리워지는 것도 발견한다.  

섬은 만원 지하철과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 잠깐 멈춰 서서 지금 잘살고 있는 건지, 바쁘다는 핑계로 놓쳐버린 것은 없는지 바람으로, 낙조로, 파도로 물어본다. 섬과 섬 사이에는 다리를 놓으면 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할까. 다음 사람과는 모래성 대신 아주 튼튼한 다리를 지으리라. 아무리 올라가 뛰어도 무너지지 않는 아주 튼튼한 관계의 다리. 바닷가에 누워 달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온다. "잘한다 잘해. 그카고 댕긴다고 결혼을 안 하지!"
대뜸 잔소리부터 시작하는 전화 너머 진한 반가움이 느껴진다. "먼 사진이고? 아이고 이제 바깥에서 자면 입 돌아간다이! 돌아댕긴다고 끼니 걸르지 말고, 밥 단디 잘 챙기묵고!"
늦은 밤 '자니' 공격을 할 이도,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는 이도 엄마 뿐이지만 이제 더는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섬마을 아기처럼 까무룩 잠이 드는 밤이다. 

영주 무섬마을의 나무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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