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기만 하던 우리집 창가가 갑자기 화사해졌다.
튤립 몇 송이 들였는데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까?
겨울 동안 거실 창가에 앉는 걸 가능한 피했지만, 요 며칠 자꾸 창가에 앉게 한다.
튤립 너 때문이다.
겨우내 이곳은 유난히도 고담시티 분위기에 묻혀있다.
온통 우울한 잿빛에 추적추적 비까지 내린다. 겨울이라 특별히 바라지도 않지만, 며칠 동안 비만 내리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모모와 나는 역마살을 열두 개씩 달고 태어난 사람들인지라 이런 날이 지속되면 둘 다 발악하듯 밖으로 나갈 거리를 찾는다.
마침 중요한 식재료가 떨어져 읍내(우리는 한국의 군(郡) 슈퍼마켓을 먼 곳 순으로 한 바퀴 돌아다닐 요량으로 외출을 서두르는데, 무슨 마음에서였는지 모모가 옆동네 Swansea (스완지 시(市)로 나가잔다. 나야 뭐 어딜가나 나가는게 우선이니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으리...,
✾ 영국(유럽)은 슈퍼마켓 어디를 가나 입구에 이렇게 예쁜 꽃과 식물들이 가득하다. Valentine's Day를 맞이해 예쁘게 포장된 선물용 꽃다발과 와인들로 입구가꽉 차 있다.
진즉 나와 꽃구경이라도 할걸...,
가는 슈퍼 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손님을 반기는 곳이 꽃매대다. 그곳에는 사계절 볼 수 있는 다양한 식물과 꽃뿐 아니라 계절마다 바뀌는 계절꽃과 모종들이 가득가득 진열되어 있다. 슈퍼에 들어서면 내 이성을 마비시키는 유일한 장소다.
오늘은 유난히 꽃매대에 꽃바구니와 꽃다발이 넘친다. 넘치는 꽃다발 중 눈에 띄는 튤립이 보인다. 색이 너무나 곱다. '어쩜 이리 색깔이 고울수 있니?' 혼자 중얼거리고 꽃매대 앞에 서 있는데, 모모가 다가와 맘에 드는 걸로 하나 고르랜다.
< 저의 브런치를 읽어 오셨던 분이시라면, 고개를 갸웃하실 겁니다. 모모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건 정말 드문 일이거든요. 그는 꽃은 먹지도 못하는데 왜 사는지 모르겠다를 달고 살거든요.>
모모 입에서 나오는 말에 나는 순간 뭐 잘못 들었겠지 싶어 꽃다발을 제자리에 놓고 자리를 옮기려는데, 세상에 내가 그동안 집 뒤뜰에 꼭 심고 싶었던(분홍색) 동백 모종이 색색이 줄줄이 서 있는 거다. 다시 발걸음을 동백 모종 앞으로 옮겨 '세상에, 세상에... 핑크색이 너무 예쁘잖아.'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것도 맘에 드는 걸로 하나 골라.' 라며 트롤리를 내 앞으로 끌고 온다.
'정말? 진심이야?'
'그래 골라라 할 때 골라, 오늘 발렌타인 Day니 내가 특별히 사줄께.'
'정말? 우아~ ST. 발렌티노 성인님! 감사합니다.'
'꽃 사주는 사람에게 감사해야지 성인에게 감사해?'
'......'
발렌타인 Day의 기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 슈퍼에서도 한 번 더 일어났다.
그렇게 사들고 온 게 연보라색 튤립 한 다발과 핑크 동백(Camellia) 한그루, 체리나무 한그루, 사과나무 한그루 이게 웬 떡인가 싶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우리에게 필요했던 식료품은 프랜치 버터 두 덩어리 였다. ㅎㅎ
배보다 배꼽이 더 컸던 나들이였지만 기분 좋은 하루였다.
맨날 꽃꽃꽃, 나무 나무만 좋아하는 나를 조금씩 이해하려 애쓰는 그의 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그에게도 꽃이 주는 마법의 기운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는 모양이다.
모국을 생각하면 추웠다 뜨거워졌다 다시 서글퍼지기를 반복 하지만, 늘 그렇듯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봄날이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고국에 계신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봄날은 올것이고,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도 곧 따습게 풀릴 거란거 너무나 잘 아시잖아요.
멀리서 보랏빛 튤립 한 다발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