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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광 May 09. 2017

알바로서 노가다의 단점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 이수증을 취득하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알바로서 노가다의 모든 장점들을 상쇄하고도 남는 단 하나의 단점은...


알바로서 노가다의 장점에 이어서 이번에는 그 단점들을 적어봤습니다. 지난번에는 장점이랍시고 16가지나 적었던 것에 비해, 단점으로는 8개만 적었습니다. 사실 8개까지 적을 것도 없이, 마지막에 서술한 단 하나의 단점만으로 다른 모든 장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전에 포스팅했던 '알바로서 노가다의 장점'과 비교하면서 이번 편을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에 링크를 첨부합니다.


관련글: 알바로서 노가다의 장점





아르바이트로서

노가다의 점 8가지




1. 일당환원주의*


하루를 일당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생긴다. 기회비용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일을 가지 않게 된 날에는 12만원 어치의 일당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일당 대신 선택한 활동에 대해서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게 된다. 그날 공부한 양과 깊이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그날 만난 사람과의 시간이 그다지 알차지 못했다던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자꾸만 일당이 눈앞에 아른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일하러 나갈 걸, 하는 아쉬움이 문득문득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다. 썩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뿐만 아니다. 무언가의 가치를 일당으로 환산하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워진다. 예컨대 100만원짜리 컴퓨터를 사고 싶은 욕심이 생겼을 때, 9~10일만 일하면 살 수 있겠네, 하는 식이다. 부동산 앞을 지나다 우연히 ‘전세 1억’ 같은 문구를 보게 되면 아주 자연스럽게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생활비를 제하고 넉넉잡아 1100일 정도 일하면 빚 없이 1억원짜리 전세를 구할 수 있겠구나.’ 아르바이트로, 잠깐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시작한 노가다였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온통 일당으로 도배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일당으로 나눠서 계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나는 너무도 싫었다.


출처: 네이버웹툰 복학왕(기안84) 129화 中


하루의 기회비용을 일당으로 계산하고, 무언가를 자신의 손에 쥐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일당으로 나누는 등 일당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일컬어 나는 ‘일당환원주의’라 이름 붙였다. 일당환원주의에 빠지는 것을 나는 항상 경계했다.


*환원주의(還元主義): 다양한 현상을 기본적인 하나의 원리나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경향.




2. 일당의 유혹


공사장에서 만났던 아저씨들은 하나같이 내게 경고했다. “노가다에 맛들리면 안 된다. 그러면 절대 다른 일 못해.”


상대적으로 높은 시급 때문이다. 수수료 떼고 받는 일당, 10만8천원. 이게 하루 10시간을 일하고 받는 일당이라면 시급은 10,800원. 가끔 ‘거저먹는’ 일이라도 당첨되면 4~5시간 일하고 10만8천원을 받는데, 이때 시급은 2만원을 웃돈다. 간혹 야간작업이다, 팁이다, 하는 명목으로 플러스알파를 받게 되면 일당이 대략 13만원~18만원선. 적잖은 돈이다.


시급만 놓고 보자면 웬만한 아르바이트쯤이야 노가다와는 애초에 비교대상이 못된다. 2017년 최저시급 6,470원 기준, 10만8천원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하는 시간은 16.7시간. 어지간한 직장들과 견줘 봐도 노가다 다니는 게 더 많은 돈을 버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 달에 20일을 일한다고 계산하면 108,000원*20일=2,160,000원이다. 욕심이 있다면 한 달 30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3,240,000원 가량 벌 수 있다는 계산이 떨어진다. 이렇게 열두 달을 일하면 38,880,000원이다. 연봉으로 따지면 대략 3900만원이다.


이런 계산은 어디까지나 판타지다. 도저히 불가능한 계산이다. 한 달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계산이 1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1년 동안 일만하는 삶에는 주말도 공휴일도 없다. 설날도 부처님오신날도 어린이날도 추석도 크리스마스도 없는 삶이다. 얼마나 팍팍한가.


설령 1년 365일 일만하겠다는 개인의 의지가 충만할지라도 1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일거리를 제공하는 곳은 없다. 인력대기소를 다닌다는 것은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는 대로, 눈이 쌓이눈이 쌓이는 대로 하루를 공치기 일쑤인 생활이다. 때문에 3888만원이라는 360일치의 일당의 총합은 영원히 가닿지 못할 신기루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당의 유혹은 치명적이다. 노가다 말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도 괜히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선뜻 노가다판을 떠나지 못하게 된다. 말하자면, 편의점에서 최저시급 받아가며 10시간 일하는 게 ‘6,470원*10시간’으로 계산되지 않고 ‘108,000원-64,700원’ 만큼의 손해로 계산되는 것이다.


이런 손해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노가다판으로 회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노가다판에서 마트로, 마트에서 다시 노가다판으로 돌아온 어떤 아저씨가 영화 <곡성> 대사를 따라하며 내게 충고했다. “동생, 절대 현혹되지 마소. 뭣이 중헌지 알제?”




3. Easy come, easy go. 


최저시급 수준의 알바만 하다가 그보다 2배 가까이 벌게 되면서 그만큼 씀씀이도 덩달아 늘어난다. 노가다 같은 ‘일당알바’는 최저시급 받고 일하는 ‘시급알바’와 특정 금액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다. 예를 들어서 2만원짜리 밥을 사 먹는 상황에서, 시급 받는 알바는 ‘2만원÷6,470원≒3시간’이라고 셈하는 반면, 일당 알바는 ‘2만원/10만원=일당의 1/5’ 같은 방법으로 계산한다. 똑같은 돈을 쓰면서도 그 금액을 ‘일당의 1/n'이라고 받아들이는 일당알바의 계산은 ‘n시간’을 결과값으로 삼는 시급알바의 계산보다 지출에 대해서 너그럽기 쉽다.




4. 불규칙적으로 일하는 습관이 생긴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일을 못 나가게 된 경우에도 여유롭다. 뭐,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니까, 언젠가 쉴 날을 다만 오늘 끌어다 쓴 것일 뿐이니까. 한 달 30일을 꼬박 채워서 일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오늘 하루 일 못 나갔다고 해서 딱히 급할 게 없는 무사태평이다. 다만 이런 낙관적(?)인 생각에 관성이 붙으면, 막상 일을 열심히 나가야 하는 상황(돈이 급하게 필요해서)이 되어서도 일 못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게 된다.




5. 데마찌! 


가끔은 일이 없다. 기껏 새벽 일찍 일어나서 인력대기소까지 나왔지만, 일이 없는 날이 있다. 어쩌다 일이 있더라도 나에게 돌아올 일은 1도 없는 그런 날이 있다. 비가 많이 내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데마찌’ 확률도 덩달아 높아진다. 차라리 인력대기소 소장이 “오늘은 일거리 없습니다”라고 언급이라도 해준다면 굳이 헛걸음하지 않아도 될 텐데, 이 세계엔 그런 거 없다. 언제 일손이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니, 일단은 인력대기소 사무실에 나와서 소장 눈도장이라도 찍고 가는 게 인지상정.


관련글: 데마찌, 일 없어요




6. 하대(下待)는 기본값


초보 잡부라면 공사장에서 사람으로서 존중받기를 포기하는 게 좋다. 초보 잡부는 일도 못하고, 힘도 제대로 쓸 줄 모르고, 공구도 제대로 다루는 게 없고, 말을 해도 통 못 알아먹는 사람이다. 현장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무시 받고 욕먹고 하대당하는 것에 일일이 마음 두면 버텨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몸도 마음도 힘든 곳에서 10시간을 버텨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일이 손에 익을 때까지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까지도 하대당하는 일은 그냥 디폴트값(default)이라 생각하고 지내는 게 좋을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데 역지사지는 큰 도움이 된다.


한번 노동력 구매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굳이 비싼 일당 지불하면서 사람을 부리기로 마음먹었는데 초보 잡부가 자기도 잡부랍시고 현장에 나타난다면? 억울할 것이다. ‘피봤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치밀 것이다. 똑같은 돈 주고 사람을 부르는데 인력대기소에서 노가다 무경력자를 보냈으니, 속은 기분마저 들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쨌거나 일손은 필요하고, 이제 와서 사람을 반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초보 잡부라 할지라도 일단은 하루 동안 데리고 일하기로 마음먹는다.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정보비대칭으로 인한 피해자와 수혜자가 여기서 갈린다. 초보 잡부인 나는 후자였다(나에게 일당을 건넨 사람들에게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7.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위태


일하면서 조심하지 않으면 나만 다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남까지 다친다. 나 때문에 남이 아플 바에야 나 혼자 그만큼 더 아픈 게 차라리 낫다. 나의 부주의함에 자책은 하겠지만 죄책감은 들지 않으므로.


자기가 자신에게 유발한 위험은 운 좋게 피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면 그만이다. 반면,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칠 뻔했을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타인이 가까스로 위험을 피했더라도 ‘다행이다’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나 때문에 저 사람이 크게 다칠 뻔했다’ 혹은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죽을 뻔했다’고 자책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이런 곳에서 일하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누군가의 귀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잠재적인 사고유발자인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에 무서웠던 경험이 있다. 나는 운전면허증도 없어서 자동차를 운전해본 적도 없고, 더욱이 교통경찰의 수신호를 유심히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건설현장에서 교통신호수랍시고 빨간 신호봉을 들고 운전자들에게 ‘정지’와 ‘진행’을 허락하는 역할을 떠맡았으니 얼마나 어리바리했겠는가. ‘정지’해야 할 때 ‘진행’을 신호하고, ‘진행’해야 할 때 ‘정지’를 지시했으니, 나 때문에 운전자들의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한 번은 코끼리만한 레미콘차가 염소만한 택시를 깔아뭉갤 뻔했다. 택시 기사는 ‘진행’하라는 나의 손짓을 너무 믿었고, 레미콘차 운전자는 ‘정지’하라는 교통신호수의 신호를 가볍게 무시했고, 나는 나의 손짓대로 모든 차가 ‘진행’하고 ‘정지’해 줄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것이 사고가 날 뻔했던 원인이었다. 비록 내가 교통수신호를 틀리지 않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형광색 조끼를 입고 있던 것은 나였기에, 빨간 신호봉을 들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기에, 모든 게 내 탓처럼 생각됐다. 퇴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관련글: 신호수, 도로 위의 지휘자



8. 다치면 크게 다친다


공사장에서 만난 아저씨들이 내게 매번 경고했다. “여기서는 다치면 크게 다친다”라고. 그러니까 알아서 조심하라고. 일은 힘들고, 주변은 위험하기에, 공사장 사람들은 제 발걸음 하나 조심히 옮기기에도 진땀이 나서 초보 잡부 따위를 신경 써서 챙겨 줄 여력이 없었다. 애초에 일하러 와서 누군가 자신을 챙겨 주길 바라는 것부터가 오류라고 하는 게 맞는 말이겠다. 대신 공사장 사람들은 초보 잡부가 일하다가 지쳐 해롱해롱 다니다 다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경고를 아끼지 않았다. “다치면 크게 다친다.”


짧은 나의 노가다 체험기에도 위험을 맞닥뜨린 순간들이 있다.


한번은 못을 밟았다. 안전화를 신었기에 다치지는 않았다. 안전화 밑창 안에 철판이 덧대어진 덕분에(그래서 안전화다) 녹슨 대못이 양말까지 뚫고 들어오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신발에 못이 박히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가 못을 밟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세 발자국쯤 걸렸다. 발걸음 소리가 이상했다. 발밑에서 ‘다그닥’하고 둔탁한 고무 소리가 나야 하는데 그 대신 나무 소리가 ‘퉁강’ 울렸다. 나무 소리의 진원이 된 발을 들어 올렸다. 안전화 밑바닥에 각목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각목에 박힌 대못이 안전화 밑창을 뚫은 것이었다. ‘내가 못을 밟았다’라는 사실을 인지하자, 엄살이 심한 나는 맨발바닥에 구멍이라도 난 듯 가슴이 벌렁거리고 속이 울렁였다. 안전화 덕분에 조족지혈만큼도 다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못이라도 밟을까봐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게 나는 문득 무서워졌다.


또 한번은 머리에 ‘빵꾸’가 날 뻔한 적이 있다. 주먹만 한 쇳덩이가 우박처럼 내리는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폐자재를 치우는 동안 한쪽에서는 ‘아시바(비계·飛階)’를 철거 중이었다. 아래서 올려다보기만 해도 아찔한 높이에서 아시바 기공(숙련공) 세 사람이 두 발을 팔뚝만한 철골에 버티고 서서 일했다. 기공은 기공이었다. 그들은 능숙했다. 아시바를 해체하는 일쯤이야 그들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철판을 떼어내고, 철골의 관절을 분리하고, 쇠파이프를 분해하는 일 따위야 그들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허공에서 일하기 전에 새참으로 막걸리를 서너 잔씩 돌려 마신 것은 그런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시바 기공들은 거침없이 일했다. 허공에서 ‘클립(철골의 관절)’을 지상으로 100번 넘게 떨어뜨려야 하는데, 매번 아래를 확인하고 목표지점에 쇳덩이를 떨어뜨리는 게 번거로웠던 모양이다. 소음 방지를 위해 땅바닥에 부직포 더미를 깔아 뒀지만, 이따금씩 쇳덩이는 부직포 더미 바깥에 떨어졌다. 그때마다 쇳덩이가 땅바닥에 ‘깡-’ 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할당된 일을 어서 제시간에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던 초보 잡부는 제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땅바닥만 보고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눈앞에서 쇳덩이가 비명을 내지르는 것을 보고는 숨 쉬는 것도 잊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능숙한 기공들이 내게 ‘사방팔방 잘 살피면서 일하라’고 경고하기 위해서 일부러 내 근처에 쇳덩이를 떨어뜨리는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아래를 살피지 않았고, 나는 위를 살피지 않았을 뿐이었다.


관련글: 아시바 해체와 자재 정리


위험했던 순간들을 일일이 열거하면 끝이 없을 듯하다. 난간 없는 계단에서 몸이 휘청했던 일, 3미터 높이의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눈앞이 하얘진 일, 5층 높이에서 아직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엘리베이터 통로로 폐자재 마대를 떨어뜨리다가 그 아래로 나까지 딸려갈 뻔했던 일, 한여름 시멘트 먼지가 자욱하던 곳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고 일하다가 시멘트 적신 땀이 눈에 들어가 눈물이 한참동안 멈추지 않던 일(그래서 요즘 미세먼지 농도 따위에 둔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쇠 자르는 기계 다루다가 실수해서 손가락 자를 뻔한 일... 다 지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숨 막히게 아찔했던 순간들이 즐비하다. 이외에도 내가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현장에서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위험들 또한 무수할 것이다. 지금 열 손가락 온전한 상태로 그때를 회상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공사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 치고 타인의 중상 또는 사망을 목격하지 않은 없었다. “멀쩡했던 사람이 내 옆에서 다치거나 죽는데, 실감이 안 나더라고.” 공사장 사람들은 말했다.


“여기서는 말이야, 다치면 크게 다쳐. 까딱하면 죽는 거야. 일하다 다치거나 죽으면 자기만 손해라고. ‘개값’도 안 돼. 고작 12만원 벌려고 나왔다가 불구돼서 죽만 먹는 사람을 내가 여럿 봤어. 죽이라도 먹고 살 수 있으면 다행이지. 죽기라도 해봐. 다 소용없어. 더 억울한 건, 일당 12만원은 손에 쥐어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 가야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너무 열심히 일하지는 마. 적당히 일하다가 일당 받고 퇴근하는 거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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