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에는 세상의 중심을 잇는 세계수 위에, 거꾸로 매달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로 오딘. 그는 전쟁의 신이자, 시와 예언, 마법과 지혜를 관장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신인 그조차도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나무에 매달아야 했다. 오딘은 9일 동안 세계수 가지에 몸을 거꾸로 매단 채, 고통을 견디며 룬 문자의 비밀을 깨우쳤다. 신으로서의 자만을 버리고, 고통 속에서 지혜를 찾은 것이다.
타로 카드의 '거꾸로 매달린 남자' 역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과 등을 진 채, 조용히 거꾸로 매달린 그는 움직이지 않지만 내면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고통을 통해 새로운 시야를 얻고, 멈춤을 통해 더 넓은 흐름을 바라본다. 이 두 상징은 시대와 형식이 달라도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 ‘희생을 통해 도달한 깨달음’이라는 깊은 주제, 그리고 ‘새로운 시각’이라는 선물.
오래전 신문을 넘기다 우연히 마주한 단어가 있었다.
Strangler Dance.
무심히 지나치기엔 너무 강렬한 단어이며, 어감이었다. ‘스트랭글러 댄스’는 교수형에 처해진 이가 목에 밧줄이 걸린 채, 마지막 숨이 끊기기 직전 보이는 움직임을 말한다. 몸이 떨리고 경련하며,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춤이 아니다. 살아 있으려는 몸의 마지막 저항, 죽음 앞에서조차 놓지 못한 삶의 본능. 나는 그 움직임을 ‘포기의 반대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죽음 앞에서조차 멈추지 않는 저항이자 반항, 어쩌면 한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이 아닐까. 나는 그 Strangler Dance라는 단어에서 영감을 받아 습작 소설을 썼다.
벚꽃이 산들거리는 오늘, 나는 '환생굿'이라는 1인극을 보았다. 세월호 11주기 연극제의 초청작이었다. 단 한 명의 배우가 전하는 서사는 더욱 깊게, 더 밀도 있게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무속의 음악과 몸짓, 전통의 숨결이 어우러져 광주의 시간을 건넜다. 그 속에는 이름조차 남지 못한, 오월 광주의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기 전, 이름을 되찾기도 전에 사라졌다. 직업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름 없이 죽고, 이유 없이 잊혀졌다. 나는 그들의 흔적을 보며 다시 ‘스트랭글러 댄스’를 떠올렸다. 역사는 언제나 고요한 춤을 추고 있었다. 숨 막히는 시대의 밧줄 앞에서, 죽음을 택해야 했던 이들이 마지막까지 떨던 몸짓. 그건 단순한 끝이 아니라, 끝까지 외치던 목소리였다. 우리는 그런 춤을 춰 온 민족인지도 모르겠다.
이태원, 그리고 세월호.
그 무수한 이름 앞에서 책임은 늘 유예된다. 진실은 뒤로 밀린다. 우리가 ‘스트랭글러 댄스’를 멈출 수 없는 이유, 그것은 마지막까지라도 저항해야 진실이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11주기를 지나며, 나는 다시 타로 카드의 ‘거꾸로 매달린 남자’를 꺼내 들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리에 서서, 세상을 거꾸로 바라본다. 그 시선은 고통 속에서 길을 찾고, 멈춤 속에서 다시 나아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런 지혜가 아닐까.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눈. 기다림 끝에 다다른 깨달음. 그리고 끝내 포기하지 않는 마음. 우리의 춤은 끝나지 않았다.
진실을 향해, 오늘도 우리는 춤춘다.
조용히, 그러나 절대 멈추지 않는다.
벚꽃이 흩날리는 바람 속에서, 오늘도 우리의 춤은 계속된다.
멈춤과 기다림: 현재 상황에서 일시적인 정체나 멈춤을 나타냅니다.
희생과 인내: 무언가를 얻기 위해 희생하거나 인내해야 하는 시기.
새로운 관점: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라는 메시지.
내면의 성찰: 자신을 돌아보고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