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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탈을 쓴 총리.

by 윤희웅


한총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다. 늘 정제된 언어를 썼고, 감정이 격한 자리에서도 조용했다. 그는 절제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절제는 진심에서 나온 균형이 아니라, 기득권이 필요로 했던 인내의 연기였다.


타로카드 14번 절제는 단순한 침묵이나 무난함을 미덕이라 말하지 않는다. 절제는 자기 안의 욕망과 두려움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그것을 조화롭게 정제해 내는 과정이다. 그 속에는 용기가 있다.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되 극단으로 흐르지 않고, 격랑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단단한 중심이 있다.


그러나 한총리의 언어는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조심스러움은 조율이 아니라 눈치였고, 그의 절제는 내면의 균형이 아니라 생존 기술이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탁월하게 읽었고, 항상 한발 먼저 움직였다. 정권이 바뀌어도 자리를 지켰고, 이념이 바뀌어도 중심은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애초에 어떤 이념에도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민정부에서 시작해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윤석열 정부까지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 특허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통상교섭본부장, 국무총리, 주미대사까지. 정권은 바뀌었지만, 그의 위치는 늘 비슷했다. 기회의 지점, 권력의 안쪽, 기득권의 경계 위. 그가 정말로 정치를 떠났던 때가 있다. 이명박 정부 이후였다. 그는 국내 최대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고, 수억 원대의 고문료를 받으며 기업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의 커리어는 늘 정중하고 무난한 얼굴을 한 권력의 충직한 실무자로 채워졌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의 부름을 받고, 다시 국무총리로 복귀했다. 그의 귀환은 희생이 아니라 기득권의 선택이었다. 정권이 필요로 한 것은 갈등을 조율할 줄 아는 협치의 얼굴이 아니라, 무난함이라는 이름의 기득권 대표자였다. 그는 한 번도 약자의 편에 선 적이 없다. 빈곤과 차별, 노동과 복지의 언어는 그의 어휘 속에 없었다. 그는 언제나 체제 안에 있었고, 체제의 논리에 충실했다. 체제에 불리한 질문은 침묵했고, 불편한 진실은 비껴갔다.

그런 그가 이제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한다. 최근 그는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러 갔다. 그러나 시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헌화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때, 그가 외쳤다.


“저도 호남 사람입니다!”


양손을 입에 모아, 외치듯 말하는 그 장면은 절제의 얼굴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생존의 본능, 정체성을 카드처럼 꺼내든 정치인의 반사적 몸짓이었다. 그에게 호남은 공감의 뿌리가 아니라, 위기에서 꺼내 드는 카드였던 것이다. 절제는 용기 있는 인내다. 그러나 그는 충돌을 피했고, 고통을 정제하지 않았으며, 늘 무탈함이라는 방어막 안에서 기회를 기다려왔다. 그는 절제의 얼굴을 한 기득권의 대변자였다.


요즘 뉴스는 소설보다 반전이 많다. 정치 기사 하나에도 캐릭터가 넘치고, 서사가 살아 있다. 작가는 상상할 필요가 없다. 그저 뉴스 브리핑을 받아 적기만 해도 단편소설 한 편 분량의 이야기 구조가 짜인다. 이쯤 되면, 작가가 이 땅에서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정치가 너무 드라마틱한나라에서, 소설보다 뉴스가 재미있는 것도 당연하다. 반전과 복선, 인물과 전개. 작가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현실 정치의 드라마다. 작가는 정치가 싫다.


절제 카드는 삶의 여러 측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인내와 신중함으로 상황을 다루며, 서로 다른 것들을 통합하고 융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극단적인 것보다는 중도를 지키고, 유연하게 적응하며, 내면의 평온을 찾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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