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도 때로 미소 짓는다.

May 12. 2025

나는 수영복보다 타로카드를 먼저 챙기는 이상한 여행자다. 친구들은 내가 짐을 쌀 때 "또 그 카드냐"며 눈을 굴리지만, 무슨 소리! 타로는 내 여행의 숨은 주인공이다. 해변에서 선탠 하는 시간보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카드를 펼치는 순간이 더 기다려지니까.

"너 타로 정말 믿어?" 새로운 사람들이 항상 던지는 질문.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믿음보다 중요한 건 대화야." 그리고 신기하게도 타로 한 장이 펼쳐지면, 낯선 이들도 금세 마음의 빗장을 푼다. 평소엔 입도 벙긋 안 할 비밀들이 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작년 보라카이, 회사 동료들과의 여름휴가. 낮에는 눈부신 백사장에서 뛰어놀고, 밤이면 어김없이 내 방에 모여들었다. "오늘은 누구 차례?" 웃음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즉석 타로 파티였다.

열대의 아침은 항상 눈부시다. 그날도 로비에서 투어버스를 기다리는데, 한국에서 온 두 여성이 수줍게 다가왔다. "선생님, 혹시... 우리도 타로 봐주실 수 있을까요?" 아, 소문이 퍼졌구나. 나는 환하게 웃으며 카드를 꺼냈다. 순식간에 작은 인파가 모였고, 호텔 직원들도 머리를 빼며 구경했다. 두 여성의 카드를 다 봐준 나는 구경하고 있는 남자 직원 하나를 불러 세웠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요.’ 그는 머뭇거리더니 용기를 내 물었다.

"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결혼할 수 있을까요?"

진심이 담긴 질문에 나도 진지해졌다. '좋은 카드 나와라!' 기도하며 카드를 섞었다. 그리고 뽑힌 카드는... 15번, '악마'.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15번 악마카드. 타로의 메이저 아르카나 중에서도 가장 오해받는 카드다. 검은 배경 위에 거대한 뿔 달린 악마가 사슬에 묶인 남녀를 내려다보는 그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절망과 불행의 상징이라 오해하지만, 타로의 진짜 메시지는 항상 그 너머에 있다.

“지금 너무 힘든 사랑을 하고 계신 것 같네요. 많이... 아프시죠?”

그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그리고 눈물이 떨어졌다. 연인의 정체는 유부녀였다.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사람도 절 사랑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나는 타로 마스터에서 친구로 변했다. "사랑이라는 게 참 이상해요. 때론 놓아주는 것도 사랑이더라고요. 내가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사랑이 우리를 쥐고 있는 거죠."

그가 웃었다. 눈물 섞인 웃음이었다. "그럼 전 이 사랑을 포기해야 하나요?"

"포기가 아니라 해방이에요. 악마카드는 겉보기엔 두렵지만, 실은 깨달음을 주는 스승 같아요."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카드가 나왔다는 건, 당신이 이미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는 증거예요. 악마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던 진실을 직면하게 만들죠."

나는 천천히 카드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타로에서 악마는 항상 역설적이에요. 가장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오히려 빛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네가 스스로 묶어둔 사슬을 봐, 그리고 이제 그걸 놓아줘'라고 말하는 거죠. 진정한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자유를 주는 거니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한번... 생각해 볼게요."

그날 이후 나는 그의 VIP'가 되었다. 직원은 나를 보면 씩 웃었고, 마지막 날 버스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우리는 웃으며 작별했다. 비행기 창문 너머로 작아지는 보라카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타로는 결코 운명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선택의 순간을 비춰준다. 15번 악마카드는 특히 그렇다. 그 카드를 제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초월할 용기를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