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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Jun 20. 2023

(47) SKT·LGU+ 국내 최초 LTE 상용화

12부. 4세대 이동통신(4G) 시대 개막

SK텔레콤 LTE 영상통화 시연 [사진=SK텔레콤]

2011년 4월 19일 경기도 분당.1)


많은 사람들이 번갈아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출발지를 통과해 시속 40~60Km로 달렸다. 그리고 모든 탑승자는 앞 좌석에서 선보인 여러 영상들에 집중했다. 이전 대비 선명한 영상통화, 툭툭 끊기지 않고 재생되는 3D 영상 등이 재생됐다. 모든 콘텐츠는 미리 촬영된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이 버스는 SK텔레콤이 마련한 LTE 시연버스였다.


LTE는 800MB 영상을 내려받는데 1분2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7분이 넘게 걸리던 3세대통신(3G) 대비 무려 5~7배 빠른 속도다. 대용량의 3D 영상 스트리밍도 깔끔하게 재생된다. 3G와 LTE 영상통화 비교 시연에서도 HD급 영상을 볼 수 있다. 영상면에서는 8배, 음성은 2배 더 품질이 높아진다.


4G 항해 앞서 3G 고도화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 KT와 KTF의 통합, LG텔레콤을 중심으로 LG데이콤, LG파워콤 합병으로 태어난 LG유플러스 등 3개 사업자가 유무선통신통합사업자로 거듭남에 따라 차기 경쟁은 4세대통신(4G)으로 옮겨 갔다. 1위를 수성해야 하는 SK텔레콤과 만년 2인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 KT, 꼴지 사업자 명패를 바꿔 달고 싶어하는 LG유플러스는 전면전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4세대 통신 규격을 논의하는 순간에도 비동기식 IMT-2000의 대표주자인 WCDMA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했다. 국내서는 전국망 완성에 이바지한 고속하향패킷접속(HSDPA)가 3G를 일깨웠다. ‘고속상향패킷접속(HSUPA)’을 통해 업로드 속도도 높아졌다.


상하향 속도를 높인 WCDMA 기술은 전반적으로 속도를 더 향상시킨 ‘HSPA’로 진화했다. HSPA는 HSDPA와 HSUPA를 결합한 용어다. 이후 하향 최대 21Mbps 속도를 구현해 3G 기술 중 가장 빠른 ‘이볼브드 HSPA(Evolwed HSPA)’가 상용화된다. 국내서는 ‘HSPA+’로 불렸다. SK텔레콤과 KT가 채택해 널리 활용했다.


동기식 CDMA는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 모두 2G 서비스로 활용하기는 했으나 내외부적인 여러 상황으로 LG유플러스만이 유일하게 지속적인 진화 기술 도입했다. CDMA2000 EV-DO 리비전.A(Rev.A)를 통해 하향 최대 3.1Mbps를, 리비전.B(Rev.B)를 상용화해 하향 최대 9.3Mbps에 도달하는 서비스를 국내 전개했다.


4G 중심에서 LTE를 외치다


과거 1~3G 이동통신이 각 국가 다수 기업들을 중심으로 여러 기술들이 표준 선점 경쟁에 나선 것과 마찬가지로 4세대도 동일한 절차를 밟았다.


우선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2008년 4세대 통신에 대한 표준 규격을 발표했다. 고정시 1Gbps, 고속 이동시 100Mbps 속도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정확한 명칭은 3G에서 ‘IMT-2000’이라 부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4G에서의 정식 명칭은 ‘IMT-어드밴스드(advanced)’라 명명됐다.


표준기술 후보는 크게 비동기식 IMT-2000인 WCDMA 계열의 ‘롱텀에볼루션(LTE, Long Term Evolution), 미국 퀄컴이 주도한 울트라모바일브로드밴드(UMB), 우리나라에서 앞세웠던 ‘와이브로 에볼루션’ 등이 꼽힌다.


기술표준 경쟁은 초기 치열하게 전개되기는 했으나 당시 과반을 차지할 정도로 채택율이 높은 WCDMA의 적자인 LTE로 기울었다. 당시 WCDMA는 전세계적으로 70% 이상의 채택율을 보유하고 있었다. LTE는 노키아를 중심으로 유럽 기업들이 연합전선을 꾸려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존 3G WCDMA망과의 연동도 탁월하고 망투자 비용을 줄이면서도 서비스 지역을 늘릴 수 있어 효율적 확산이 가능했다.


결정적으로 독자 기술을 밀었던 퀄컴이 UMB를 포기하고 LTE로 선회하면서 무게추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우리나라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여러 기업들이 와이브로를 밀기는 했으나 열세를 이기기 어려웠다.


즉, ‘4G=LTE’ 라는 등식은 정확하게는 ‘4G가 곧 LTE’라는 등가교환이 아닌 ‘4G 기술경쟁에서 LTE가 승리했다’로 읽어야 한다. 수많은 기술에서 결국 LTE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았고, 역사가 4G를 LTE라고 기록한 셈이다.


롱텀에볼루션(LTE, Long Term Evolution)을 직역하면 오랜 기간 동안의 진화다. 통신 규격으로 쓰기에는 엉뚱한 문구지만 3세대(3G) 통신에서 4세대(4G)로 진입하는 기간 또는 WCDMA에서 LTE까지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기에는 적당한 명칭이다.


LTE가 첫 상용화된 때는 2009년 12월 14일이다. 유럽 이통사인 텔리아소네라가 세계 최초 타이틀을 목에 걸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텔리아소네라가 최초 상용화 타이틀을 목에 건데는 우리나라의 기여도가 크다. 삼성전자의 통신모뎀과 라우터가 쓰였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 이통사 AT&T와 버라이즌, 일본 NTT도코모와 유럽 보다폰 등이 LTE 도입 추진을 서둘렀다.


국내 최초 4G LTE 상용화


삼성전자 LG전자 LTE 폰


그렇다면, 국내 이통3사는 어떤 표준을 선택했을까.


정답은 모두 ‘LTE’다. SK텔레콤과 KT는 유럽식 WCDMA로 망을 구축했기에 LTE를 도입하면, LTE가 WCDMA와 연결되는 기술 방식이었기에 망투자 비용을 줄이면서도 서비스 지역을 더 빠르게 가져갈 수 있었다.


LG유플러스는 사정이 달랐다. LG유플러스는 2G CDMA를 지속적으로 진화시켜왔기에 호환성을 고려한다면 와이브로 에볼루션이나 UMB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LG유플러스는 과감한 도전을 선택했다. SK텔레콤, KT와 마찬가지로 LTE를 도입하기로 했다. 경쟁사와는 달리 망을 새로 설치해야 한다는 핸디캡이 있기는 했으나 이번에야말로 그간 주장해왔던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서라도 동일한 기술로 승부해야 했다.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의 경쟁양상은 LTE를 상용화하는 순간에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1위를 수성해야 하는 SK텔레콤과 이번에야말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LG유플러스의 의지는 상당했다. 2011년 7월 1일 자정. 0시를 기해 각각 LTE 상용화 선포식을 개최했다. 그 이른 시간에 하성민 SK텔레콤 사장과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이 각각 LTE 상용화 선포식에서 LTE 신호를 쏘아 올렸다. 바야흐로 국내 최초 LTE가 상용화된 때다.2)

SK텔레콤, LTE 국내 최초 상용화 기념 카운트 다운 행사 가져 [사진=SKT]
LG유플러스 네트워크 센터에서 이상철 부회장(왼쪽 세번째)이 서울, 부산, 4G LTE 서비스 기념 깃발을 꽂고 박수치고 있다. [사진=LGU+]

SK텔레콤은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LG유플러스는 서울과 부산, 광주 등 주요 도시를 초기 거점으로 삼았다. 후발주자였던 LG유플러스는 더 넓은 커버리지를 통해 단기간 내 전국망 구축을 완료, 경쟁구도 바꾸기에 집중했다.3)


상용화 당시 LTE 속도는 이론상 다운로드 속도 최대 75Mbps. 3G 네트워크 기술 중 가장 빠른 HSPA+보다 3배 이상 빨랐다. 1.4GB 영화 한편을 2분만에, 400MB MP3 100곡을 40초 안에 다운로드가 가능한 수준이다. 기존 3G 망에서는 각각 15분, 5분 가량이 소요됐다.


다만, 양사의 눈엣가시는 스마트폰이 없었다는 것. 텔리아소네라와 마찬가지로 LTE 스마트폰이 아니라 모뎀과 라우터를 통해 실현했다. 실제 LTE 스마트폰은 3개월 후인 9월 28일 SK텔레콤을 통해 첫 판매됐다.4) 첫 단말은 삼성전자 갤럭시S2 LTE였다. 하루 차이로 29일 HTC 레이더4G가 출시됐다. 그 때까지는 사실상 모양만 LTE 였다.

‘갤럭시SII LTE 익스피리언스 데이’에 참석하여 축하 무대를 펼친 갤럭시 모델 아이유 [사진=삼성전자]

실제 국내 LTE 스마트폰이 도입되면서 LTE는 대중화에 한걸음 더 다가갔다. 갤럭시S2 LTE를 시작으로 3개월도 채 안돼 100만대가 넘게 팔렸다. SK텔레콤은 같은해 연말 LTE 가입자 50만명 돌파를 알렸다. 3G 상용화후 50만명 돌파까지 약 1년 2개월이 걸린 것과 비교하면 무려 2.5배 빠른 속도였다. LG유플러스도 SK텔레콤보다 다소 늦었지만 연말 가입자 50만명을 넘어섰다.


국내서는 100만명이 돌파한 초기 상황이었으나,5) 글로벌 시장에서는 한국의 LTE 스마트폰 수요가 8분의 1을 차지할만큼 대단한 숫자였다. 이 때부터 글로벌 제조업체들이 너나할것없이 한국을 LTE 테스트베드로 선택하기도 했다.


사업권 주파수, 패러다임 전환


과거 차세대 통신 시장이 열리면 배타적 권한을 부여한 사업권을 선정된 기업에게 부여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사업권을 따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4세대부터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전환된다. 이미 통신산업 구조조정 정책에 따라 유무선통신통합사업자 3강 구도가 완성된 때였기 때문에 사업권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정부 입장에서는 다른 의미의 틀이 필요했다. 이동통신의 토양 역할을 하는 ‘주파수’가 그 중심에 섰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고추밭과 배추밭을 너한테만 줄테니 해당 작물을 키워봐라”에서, “무엇을 심어도 괜찮은 좋은 밭을 줄테니 토지 목적에 맞춰 농부가 알아서 농사를 지어라”로 바뀐 셈이다. 다시 말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의 면적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기존 사업권 획득이 아닌 더 많은 주파수를 확보하는 것이 미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수단이다.


LTE 도입을 위해 이통3사 역시 가용 주파수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 중 2G 서비스만을 운용하고 있던 LG유플러스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보유한 주파수에서 운용하고 있던 서비스를 LTE로 대체해야 했는데, LG유플러스는 2G 종료 없이도 LTE 운용이 가능했다.


보유한 1.8GHz 주파수는 2G 서비스를 그대로 유지하고, 800MHz 주파수 20MHz 대역폭에 LTE를 도입했다. 상하향 각각 10MHz 대역폭을 서비스할 수 있었기에 '진짜 LTE’ 표방했다.


SK텔레콤은 800MHz 주파수 30MHz 대역폭에서 2G 서비스를 운용 중이었다. 초기 2G 유지를 위해서 10MHz대역폭 떼어 내 LTE를 도입했다. 이 때문에 도입 당시에 LG유플러스 대비 속도 경쟁에서 밀렸다. LG유플러스가 ‘진짜 LTE’를 내세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10월 800MHz 주파수에서 10MHz 대역폭을 더 가져와 상하향 각각 10MHz폭으로 동등한 조건을 갖췄다.


결과적으로 LTE 스마트폰이 9월말 출시됐기 때문에 LG유플러스와 SK텔레콤의 초기 LTE 속도 경쟁은 큰 의미가 없기는 했으나, LG유플러스 입장에서는 느리다는 기존 인식을 뒤바꾸기에 충분했다.


LG유플러스는 '역사는 바뀐다'라는 카피를 통해 마틴루터킹 목사와 오바마 대통령을 광고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I have a dream’, ‘Yes, We can’ 등 명연설을 통해 과거 흑인의 고정관념을 깨고 불가능한 꿈을 실현한 유명인들을 빚댄 LG유플러스의 의지를 잘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LG유플러스의 4G LTE 광고 캠페인 ‘역사는 바뀐다’의 한 장면. [사진=LGU+]
LG유플러스의 4G LTE 광고 캠페인 ‘역사는 바뀐다’의 한 장면. [사진=LGU+]

한편, LTE를 도입할 수 있는 여유 주파수가 없었던 KT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이미 주파수 경매를 통해 SK텔레콤에 뼈 아픈 좌절을 겪었다. 대안은 1.8GHz 주파수 2G서비스를 종료하고 LTE를 도입해야 했다. 하지만 2G 이용자가 많았기 때문에 사업자 마음대로 서비스를 종료할 수 없었다. 외부적으로는 LTE에 대응해 3W 전략(3G WCDMA, 와이브로, 와이파이)을 구사하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2G 사용자의 서비스 전환을 설득해야 했다.


아이폰 도입 못한 LGU+

LGU+ 4G LTE 기지국 시험주파수 발사 [사진=LG유플러스]


3세대부터 다른 통신규격을 사용한 SK텔레콤, KT와는 달리 LG유플러스는 단말 수급에 몸살을 앓았다. LG유플러스가 타 이통사와 다르게 전용폰이 나왔던 이유는 통신규격 때문이다. 유심을 기반으로 한 SK텔레콤과 KT간의 이동은 유연했던 반면, LG유플러스는 단말상 이동이 불가능했다.


가장 큰 아픔은 외산폰 도입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애플 ‘아이폰’이다. LG유플러스에서 ‘아이폰’이 나올 수 없었던 이유는 크게 통신규격과 주파수 때문이다. 애플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통용되고 있는 유럽식 GSM 방식으로 ‘아이폰’을 설계했다. CDMA를 채택한 이통사는 규격이 맞지 않아 아이폰 출시가 어려웠다.


물론 반전도 있었다. 애플이 미국 이통사 버라이즌에 아이폰을 공급하기 위해 CDMA망에서 활용할 수 있는 ‘아이폰’을 설계하기로 한 것. 당시 아이폰은 2G 리비전.A를 지원했다. 동일한 통신규격을 활용했던 LG유플러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G유플러스의 ‘아이폰’ 도입은 요원했다. 애플이 설계한 2G용 아이폰은 800MHz와 1.9GHz 주파수 대역의 리비전.A만을 지원했다. LG유플러스는 1.8GHz 주파수 대역에서 리비전.A를 서비스해 주파수가 달랐다.


결과적으로 아이폰이 LG유플러스에 출시되려면 애플이 따로 LG유플러스 주파수 상황에 맞는 아이폰을 또 별도로 제작해야 했다. 전세계 대비 상대적으로 가입자가 적은 국내 시장에서 3위 사업자를 위해서만 아이폰을 별도 제작해줄리가 만무했다.


적은 주파수와 상이한 통신규격을 서비스하던 LG유플러스는 2011년 4세대 통신 LTE를 상용화하면서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이통3사 모두 동일한 통신규격을 활용함으로써 단말에 따른 제한이 풀렸다. LG유플러스 단말도 유심 슬롯이 지원됐다.


LG유플러스에게도 아이폰 도입 청신호가 켜지기는 했으나 완전한 의미의 LTE는 아니었기에 기다림이 필요했다. 데이터뿐만 아니라 음성통화에서도 LTE를 쓸 수 있는 VoLTE가 상용화돼야 했다. 즉, LTE 전국망에 따른 완전한 LTE 서비스 도입이 돼야만 비로소 아이폰을 도입할 수 있었다. LG유플러스는 3G가 없어 2G로 이를 대신하는 처지였다.


이후 LTE망을 활용해 음성통화가 가능한 VoLTE 연동이 가능해진 LG유플러스는 2014년 첫 ‘아이폰6’를 출시했다. 전세계적으로 모든 이통사가 아이폰을 출시한 곳은 우리나라가 처음이었다.


매번 반복되는 과도기


LTE는 처음부터 4G 기술로 불리지 않았다. WCDMA의 진화 측면에서 부각돼 3.9G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ITU가 2010년 12월 9일 4G 용어 개념을 확장 적용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 LTE가 당당히 4G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LTE와 함께 와이브로 에볼루션(와이맥스)와 3G HSPA+도 4세대에 해당한다고 발표했다. 이 때문에 3G HSPA+를 지원하는 스마트폰에 ‘4G’ 명칭이 붙기도 했다. 삼성전자가 2011년 상반기 미국 AT&T를 통해 출시한 ‘인퓨즈 4G’가 대표적이다.


또한 국내서 와이브로를 서비스 중인 KT가 이후부터는 ‘와이브로 4G’라 서비스명을 바꿨다.


새로운 세대가 열릴 때마다 발생하는 과도기적 현상들로 앞선 사례나 미래 5G 상용화 시점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례다.


1) 김문기 기자, SKT 'LTE 시연버스' 체험해보니, 아이티투데이, 2011. 4.19.

2) 정경미 기자, 'SKT 서울중심' 'LGU+-거점도시' LTE 상용화, 아이티투데이, 2011. 6.30.

3) 정현정 기자, SKT LGU+, LTE 전파 첫 발사, ZDnet, 2011. 7. 1.

4) 김문기 기자, SKT, 28일 LTE 스마트폰 요금제 출시, 아이티투데이, 2011. 9.28.

5) 함정선 기자, LTE 100만 돌파, '통신업계 지형도 바뀐다', 이데일리, 201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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