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쓸쓸한 서울
거주할 곳을 정하는 것은 아마 각자 살아가는 방법이나 가치관, 삶의 기준, 생계 등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살아가야 하는 공간이 서울이고, 이곳에서 생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서울은 거주지로써 우리 가족에게는 우선순위였다. 서울은 터무니없이 넓고 황량하다. 그러나 서울은 강과 산을 가진 매우 아름다운 거대한 동네다. 이 양면성 중에서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으려면 개인은 어쩌면 사투를 벌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처럼 거칠고 두려운 세계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것은 70년대를 연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80년대를 연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과 같은 작품이 던지는 화두에 너무 그물처럼 얽매여버린지 모른다. 서울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 하나쯤 있을 법한데 떠오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나조차 서울에 대한 거대한 공룡에게 이미 마비되어 버렸을지 알 수 없다.
내가 들어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서울만큼 황량하고 텅 빈 거대한 공간이 또 있을까. 어떤 공간 속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할 때는 어디나 이방인처럼 쓸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서울에서 다시 가족을 품을 집을 구하러 바람처럼 쏘다녀야 했다.
지금 서울 집값은 감히 집을 가지고 싶은 생각이 오히려 주제넘을 정도라고 말하는 듯하다. 게다가 강남과 강북이란 이분법이 사람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존재한다. 우리가 어떤 공간에 속하는 존재인가를 나누는 너무나 쓸쓸한 공간.
그런데 이 거친 쓸쓸함에 함몰되지 않고도 다행히 우리 가족은 마포, 홍대 앞으로 이주하기로 주저 없이 정했다. 속으로는 정말 다행이었다. 세 아이가 강남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부 다녀서 혹시나 친구들과 멀어지고, 살던 터전에서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지도 몰랐기 때문에 우려했었다.
또한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게도 넘실대는 강을 사이에 두고 제멋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재단한다. 강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던지 도도히 흘러가며 싹 무시해버리겠지만.
홍대 앞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
서교동에서 잠시 가게를 오픈해보았던 딸이 계속 가게를 하고 싶어 했고, 취급하는 상품들로 보아서 홍대 근처 마포여야만 했다. 홍대 앞 상권이 만만치는 않다. 솔직히 2년 간만 가게를 연습 삼아 해보라고 했지만, 내심 회사로 돌아가겠지 했던 예상에서 이미 비껴가기 시작했다.
패션회사, 그것도 강남의 거대한 패션회사를 다닌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드라마처럼 멋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디자인도 잘했지만 의류 MD가 원래 꿈이었던 딸은 졸업 전 인턴을 시작으로 졸업 후에 직장까지 회사에서 천 먼지를 뒤집어쓰고 와서 쿨럭거렸고, 원단을 찾아 공장 등을 방문하고,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했다. 무엇보다 의류공장들이 해외로 나가야 하는 경제상황을 맞닥뜨리면서 딸은 회사에서 계속 오라는 전화가 와도, 불안정하지만 가게를 더 재밌어했다.
가게 오픈 시에도 사실 딸들이 전국적으로 소문난 캐릭터 덕후 인지도 모르고, 방송사서 촬영도 오고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어, 그렇게 좋으면 가게를 연습 삼아 오픈해보라고 했던 것이다. 직장 문제는 친구며 선배들이 다 의류회사에 얼마든지 있어서 딸이 그 세계를 더 잘 알 것이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로서 가타부타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가게를 계속하겠다는 딸의 말을 듣고, 10월 말이 재계약을 해야 하는 달이니 굳이 상가를 따로 구입을 할 것이 아니라 상가와 주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집을 마련하자고 속전속결로 나는 결정했다. 그때가 바로 여름으로 접어드는 무렵이었다. 적어도 3개월 전에 계약 해지를 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7월까지는 집을 구입해야 했다. 그러니 구입기간은 딱 2개월 남짓이었다.
가게가 있던 서교동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주택이 될 공간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쓰나미처럼 주택들이 상가로 변해가는 서교동에서 경의선 숲길 공원의 땡땡 거리 바로 뒤편에 2층 주택이 겨우 하나 나와서 이모저모 따질 것도 없이 바로 계약하기로 했다.
그런데 계약하는 날, 매도자의 마음이 갑자기 돌변했다. 우리에게 그 집을 사서 무엇을 하려는지 물어보더니 우리의 계획을 듣고는 바로 자신들이 그렇게 하겠다면서 부동산에 내놓은 집을 즉시 회수하면서 계약은 물 건너갔다. 상가와 주거를 동시에 해결하겠다는 말을 너무 친절하고 구체적으로 했던 것 같다.
부동산에서 다시 소개해준 집은 땡땡 거리와 거의 붙은 2층 집이었는데, 그곳은 또 집을 지으려면 2가구씩 묶어서 개발해야 되는 지구단위계획지역이라고 했다. 단층이고 평수가 아주 작은 앞집과 함께 개발해야 하는데 그 사람은 무속인이라서 거의 집에 없어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아마 집 지을 계획은 없을 수 있다고 해서 망설였다.
결국 묶어서 개발해야 한다면 많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몹시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기다릴 시간도 없고 매물도 없었다.
조금 떨어졌지만 연남동을 3회 정도 밤과 낮으로 다녀봤다. 가게를 할 것이면 밤과 낮의 유동인구도 살펴보고, 주택으로서도 방범이나 치안문제를 살펴봐야 했기 때문이다. 경의선 숲길 공원이 형성된 연남동도 이미 걸어서 약 10분 이내 거리는 주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상가로 무섭게 변하고 있었다.
딸이 서교동에 가게를 오픈한 해인, 그해 12월에 경의선 숲길 공원이 오픈하면서 공원을 따라 모든 것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는 집들은 점점 멀리로 밀려나고 결국 나온 매물은 지하철 역에서 15분 이상을 가야 했고, 도로는 너무 좁았다. 연남동도 지하철역에서 10분 이내만 사람들이 붐볐다. 연남동도 포기했다.
지하철역에서 10분 이내가 무조건 내가 집을 구입하는 조건의 1순위였기 때문이다. 퇴근이 막차 시간인 나로서는 불가피한 설정이었다. 그다음 간 곳이 망원동이었다.
그러나 딱 한 번만 가보고 그곳도 매물이 지하철역에서 멀리 있어서 구입하는 장소로는 처음부터 제외시켰다. 그러다 보니 홍대 근처의 지하철역을 낀 동네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하철 지도를 쫙 펼쳐놓고 홍대를 낀 지하철 역 주변의 동네를 다시 체크해보니 딱 한 군데 남아있었다. 바로 상수역이었다.
이곳은 딸이 주택은 없을 거라는 말을 해서 처음부터 제외시켰던 곳이었다. 홍대 클럽문화와 술집들이 많아서 주거로는 아닐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지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었지만, 이곳 외는 더 이상 가볼 곳이 없었다. 마침 미국에서 온 동생과 딸을 보내서 매물이나 나와 있는지, 또 어떤 동네인지 구경이나 해보고 오라 했다. 다들 어쩔 수 없는 얼굴로, 역시 아닐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냥 한번 가보지 하는 억지춘향 격으로 갔다.
그리고 그날은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집 사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두 사람이 상수역을 다녀온 다음날 바로 모든 것을 다 제치고 내가 직접 가게 되었고, 덜컥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서울에 올라와 살면서 40여 년 가까이 아파트에서만 거주했다. 그러다 보니 서울 주택구입에 대한 노하우도 없었고, 주택을 신축하려면 지구계획이란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주택을 매입하려고 마음먹을 때는 나의 모든 계획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미숙해서 계약이 깨졌고, 자칫 잘못했으면 이루어질 수도 없을 지구단위계획으로 묶인 집을 살 뻔했다. 그 집을 구매했더라면 언제 집 짓기가 이루어질지 하 세월이었을 수 있고, 그보다 더한 많은 문제들이 생길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일들은 가게 계약 만기가 얼마 남지 않아 급히 부동산을 알아봐야 했던 다급한 상황에서 빚어졌다.
또한 등기부등본확인, 토지대장확인, 건축물대장, 토지이용계획확인서등을 미리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너무 이리저리 재고, 계획만 오래 하고 있었더라면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행동으로 옮기고 실행하되 최대한 법적인 문제들을 잘 살펴보고, 정보를 많이 접하고, 건축 관련 책도 많이 읽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안다고 해서 집 짓기에 많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상가주택 짓기는 또 그냥 집 짓기와는 다른 상황에 맞닥뜨려야 했다.
서울에서 집 사기는 무모할 수도 있지만 이루어만 진다면 참 따뜻한 일이다.
바슐라르가 말한, 집이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