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5학년까지 다닐 수는 없어
한동안 '융합형 인재'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하나의 전공, 하나의 기술만 가지고 취업을 하고 먹고사는 게 아니라 다양한 학문과 기술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재라고 한다. 기업에서 융합형 인재를 선발한다는 뉴스 기사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평생 주입식 교육을 받으면서 살아왔는데 갑자기 융합은 뭐야. 창의적인 인재가 되는 것도 어려운 판국에.'
결국 대학 졸업 후 취업은 해야 하니 기업에서 원하는 융합형 인재라는 장단에 춤을 춰보기로 했다. 동기들도 많이 한다던 복수전공을 알아봤다. 복수전공 제도는 기본적으로 대학마다 다르다. 전공에 따라서 제한 없이 받아주기고 하고, 인기가 많은 전공은 인원 제한을 두기도 한다. 문과에서는 경영학과 이과에는 컴퓨터공학, AI 관련 전공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문과는 전통적으로 상경계가 취업이 강한 모습이었다. 은행 등 금융권 취업에도 쓸모가 있고 일반 대기업에 지원할 때도 가장 무난하기도 하다. 금융권 취업을 생각한다면 경제학도 좋지만 수학에 약한 문과생들은 선택하기가 부담스럽다.
기업에서 특히 IT와 연계된 융합형 인재를 선호하기에 컴퓨터공학과의 복수전공도 인기가 많다. 제한된 복수전공 선발인원에 들어가려면 기본적으로 학점이 높아야 한다. 대학 입장에서도 별도 시험을 치르거나 면접을 보는 건 부담스러우니 가장 손쉬운 수단으로 학점을 선발기준으로 채택한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이제 코딩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온다고 했으니 컴퓨터공학 말고 다른 전공 골라야겠지?'
AI가 등장하면서 편리한 점이 많아졌다. 궁금한 게 생기면 구글이나 네이버에 접속해서 하나씩 검색할 필요 없이 AI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 대학교 과제를 할 때도 초안 작업을 맡기면 순식간에 만들어준다. 동기 중에는 챗GPT로 만든 과제를 그대로 제출했다가 교수님께 0점을 받은 사례도 있지만 말이다. 논문 표절을 검증하는 프로그램처럼 AI를 얼마나 참고했는지 확인하는 프로그램도 있다는 걸 고려했어야지. 교수님마다 AI활용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성향을 잘 파악해야 한다.
생성된 결과에 대해 검증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과제를 자연스럽게 다듬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더 이상 AI가 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렇듯 세상은 더 편해지고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그 기술이 내 취업길을 막으려 하고 있다.
OpenAI의 CEO인 샘 올트먼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세상을 대비하기 위해 기본소득 실험을 했다고 한다.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지만 결과가 좋았기를 바랐다.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이렇게 힘들게 아르바이트하면서 대학을 다니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연구 결과는 애매했다.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확실한 효과가 있다고 보기에도 어렵다고 할까.
어떤 일을 해야 AI에게 가장 늦게 대체될까 고민하다 AI와 관련된 전공을 골랐다. 이름부터 AI융합학과로 컴퓨터공학과 산업공학 그리고 AI까지 다양한 과목이 개설되어 있는 전공이다. 수학에 자신이 없어 순수 인공지능은 부담스러웠던 터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복수전공을 선택하면서도 개인적인 흥미는 크게 없었다. 여전히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은 없고 졸업하면 밥벌이는 해야 하니까. 다행인 점은 대학교마다 복수전공 학점 이수조건이 다른데, 우리 학교는 전공 이수학점이 많이 늘어나지 않는 편이다. 기존 전공 필요 학점을 채우고 그만큼 복수전공 학점도 채우려면 추가 학기를 들어야 되는 학교도 있다고 들었다. 우리 대학은 원래 전공 학점을 조금 줄이고, 교양 학점을 많이 줄이는 형태로 되어 있어서 5학년 등록금까진 내지 않아도 된다. 필요하다면 방학 때 계절학기를 몇 과목 정도만 듣는다면 졸업에 지장은 없다.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5학년까지 다닌다고 큰 지장은 없겠다 싶지만 국가장학금에 영향이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생활비가 부담되는 상황에서 학비를 1년 더 내는 건 너무 큰 부담이다.
그동안 학점 관리를 나쁘지 않게 한덕에 복수전공 신청은 통과했다. 복수전공 수업은 정말 고난의 연속이었다. 수능 시험을 마치고 가장 좋았던 것 중 하나가 수학 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는데, AI는 생각보다 고난도의 수학 실력을 요구했다. 이 정도면 석사 과정에서 해야 하는 수준이 아닌가 교수님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물어봤다. 교수님은 빙긋 웃으면서 '이 정도 수학은 기본 중에 기본이에요.'라고 말씀하셨다.
나.. 졸업은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