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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an 30. 2018

저마다 사정이 있겠지



책방에 입고된 책 중 한 권을 열심히 보더니 사장님이 책을 덮고 말한다. “경희 씨,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거예요. 유부남이 바람을 피우는 것도, 미혼의 여자가 굳이 유부남을 만나는 것도. 누구 에게나 사정은 있어요.” 사랑에 관한 단편 만화를 보고 나서 내린 사장님의 결론이었다. “그렇죠.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정은 있겠죠. 뭐, 그렇다고 바람피우는 게 썩 좋은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 만.” 내가 대답했다. 


그런 대화를 끝내고는 퇴근했다. 토요일 밤 10시, 지하철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중에 열차가 지나갔기에 10분을 기다렸다. 주말에는 열차 배차 간격이 꽤 길다. 기다리던 인천행 열차가 들어왔고, 열차에 탔다. 네 정거장을 더 가 환승역인 부평역에 다다랐다. 내리려는 찰나, 대여섯 살 아이들이 열차 안으로 뛰어든다. 바로 뒤에 아이의 엄마가 열차 안으로 들어온다.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지하철 안에 뛰어들면서 타는 아이들 이 예쁘게 보일 리 없다. 그런 아이들을 제재하지 않는 아이의 엄마도 영 못마땅하다. 하지만 별수 있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 이 30초도 안 되니 어쩔 수 없다고 속으로 삭히는 거지.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불과 30분 전 사장님이 뱉은 말이 생각났다. “경희 씨,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정이 있어요.” 마치 사장님의 말이 부처님, 하느님의 말씀처럼 귀에 맴돌았다. “그래. 저 아이들에게 도 사정이 있겠지… 종일 걸어 다녀서 자리에 앉고 싶었을 거야. 아님 유치원에서 지하철 예절을 아직 배우지 않았을지도… 그래, 저 아이의 엄마도 마찬가지겠지. 육아에 지쳐 아이들에게 잔소리할 힘이 없었던 거겠지. 그래, 그래. 토요일 늦은 밤이니까…’ 나는 생각했다. 


다음 날,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예전에는 매주 일요일마다 만나 밥을 먹고 카페에서 각자 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지 만 친구에게 남자 친구가 생기면서 일요일 만남은 자연스레 파투가 났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만나 일요일을 보내기로 한 거였다. 약속시간 한 시간 전 친구의 문자가 왔다. 


“미안, 나 오늘 안 될 것 같아. 남자 친구가 갑자기 동네로 왔어.”

“뭐라고?” 

“미안. 어쩔 수가 없네. 사실 어제 싸웠는데, 화해하자고 와서 …” 

양해도 아닌 통보다. 욱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욕을 잔뜩 했다. 

“야! 이 지지배야! 너 친구 버리고 얼마나 잘 만나나 보자. 에라이, 나쁜 지지배!


실컷 욕했지만 ‘그래, 한창 좋을 때니까. 연애 초반이니까. 그럴 수 있는 상황이야…’ 생각했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겠지. 

그럼 내 사정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열차에서 내리려는데 대뜸 뛰어드는 아이들을 피해야 하는 내 사정은? 

씻고, 옷까지 입고 나갈 준비를 끝냈는데 갑자기 취소된 약속을 받아들여야 하는 내 사정은? 


‘사장님 전 글렀어요.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겠지만, 전 그냥 제 사정만 생각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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