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런 ‘비장소’에서 무슨 알찬 시간이람. 멍이나 때리자”는 마음가짐, 아주 필요합니다.
<영하의 날씨 중..>
이러니 '비장소'라는 생각이 들지... ;;
고백한다. 시간을 낭비했다. 오늘 오후에 계획했던 일은 세 가지였다. 그중 딱 한 가지만 했다. 한 번 밀린 일은 회복이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까지.
아침이 되었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점심때가 다 되어서 일어났다. 새벽 늦게까지 깨어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아침을 통으로 날렸으니 오후에 더 밀도 있게 일을 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없다. 오히려 더 느슨해진다. 아침이었다면 1시간 안에 어떻게든 집정리를 마치고 할 일을 했을 거다. 집정리를 마친다는 것은 완벽하게 정리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뭐, 대충 1시간 정도의 틀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밀려 버리니 자꾸 추가를 한다. 오전이었다면 설거지와 청소기만을 돌렸을 텐데. 오후에 청소를 하니 설거지, 청소기, 먼지 닦기, 책장정리, 책상정리, 책꽂이 정리. 평소에 미루던 일들에 손을 댄다. 정말 이상하다.
그러면 오후에 나는 알차게 시간을 보낸 걸까. 아니면 시간을 낭비한 걸까. 계획한 일을 다하지 못했다. 계획하지 않은 일은 했다. 심지어 아이의 진로 문제로 전혀 계획 범위에 없던 선생님 두 분과 상담전화도 했다. 낭비일까? 알참일까?
[영하의 날씨]에서 김영하 작가는 독자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는데.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 인문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의 ‘장소’와 대비되는 ‘비장소’라는 개념에 대해 언급을 하며 답변을 했다. 비장소란 쇼핑몰, 영화관, 지하철과 같은 곳을 말한다. 이 비장소는 결코 ‘인간적인 장소’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장소에서는 시간을 밀도 있거나 심도 있고 알차게 보내기 힘들다. 그러니 이런 비장소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못했다고 자책하면 안 된다고 했다. 허비되는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존재함만으로도 충분한 인간이기에 오히려 멍이나 때리자고 말해주었다.
작가의 이 말이 오늘 계획한 일을 못해 시간을 낭비했다고 자책했던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물론 비장소에 있지는 않았지만. 가끔 나만의 보금자리인 집이 비장소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니. 괜찮다. 그럴 때도 있는 거니깐. 비장소인 거실에서 청소를 하면서 멍을 때릴 수도 있다.
오늘은 이제 1시간 정도 남았다. 이제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라는 곳에 왔다. ‘비장소’에서 멍 때리다 못한 일을 수습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려 한다. 그 하루가 0시를 넘길 듯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장소에서 보내는 가장 인간적인 시간대이니. 조금은 밀도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내일은 부디 '오전'이라는 시간대에 일어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