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턴을 좋아하나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제 시간 안에 혹은 데드라인이 지나도 마감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싸한 기분이 들 때가 있잖아요. 하긴 해야 되겠는데 이건 뭐 답이 없을 때. 갑갑한 마음에 거의 포기하고 질질질 끌고 있을 때가 있잖아요. 그때 해야 할 건 딱 두 가지 중에 하나예요. 깔끔한 포기 또는 과감한 유턴.
과감한 포기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단지 시간이 지나 ‘그때’를 생각할 때 조금 아쉬움이 남을 수 있어요. 물론 잘했네. 이런 감정이 생길 수도 있지요. 어찌 되었든 포기 자체가 나쁘다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제가 포기해서 다행인 일도 있거든요. 남편의 월급인상, 아이의 수학성적… 뭐 이런 건 아니고요.(아닌 걸로 할게요. 나중을 위해서….) 위층의 층간소음을 포기했어요.
그런데요 짜증을 내면서 포기한 것이 아니에요.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포기도 아니에요. 그저 현실적인 포기와 대안을 마련한 포기예요. 아이들이 있으니 뛰는 건 당연하잖아요. 물론 새벽에 나는 소음으로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뭐 주관적으로 시-이-임-가-아-악-하-아-안. 휴우, 소음도 아니고요. 살짝 쿵쿵거린다 싶으면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되고요. 늦은 밤과 새벽에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을 할 땐 어차피 이어폰을 귀에 꽂으니깐요. 신경 끄고 포기하고 나름의 대안을 마련하니. 포기가 어느 정도는 되더라고요. 조금 안타까운 건 남편은 아직 포기를 못한 거예요. 남편 작업방이 직격타를 받나 봐요. 포기라는 게 그래요. 마음과는 다르게 쉽지 않긴 해요.
포기가 쉽지 않을 때는 과감한 유턴을 해야 돼요. 제가 그랬어요. 오일파스텔은 그리고 싶은데. 이게 매일 그리는 습관이 잡히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림 있는 책’이라는 펀딩에 참여를 했어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무언가 목표라도 있으며 오일파스텔을 그리겠지. 이런 마음으로 신청을 한 거예요. 뭐, ‘그림 있는 책’까지 만든다고 하니. 일석이조 아니겠어요. 그래서 시작이라는 것을 했지요. 그런데요. 오일파스텔을 그리는 것이 쉽지 않아요. ‘망’의 냄새가 나지요. 거의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그나마 그리던 것도 손을 놓았어요. 도저히 진행이 안 돼요.
그런데 사람의 심리가 이상하지요. 같이 펀딩에 참여하신 분들이 한 분, 두 분… POD 출판으로 ’ 그림 있는 책‘을 출판하시는 거예요. 아, 나도 해야 하는 데…. 돈 냈는 데…. 몇몇 지인들에게 얘기했는 데…. 포기를 못하겠는 거예요. 그러다 교보 POD 기획전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어요. 네, 발등에 불 떨어졌어요. 오, 이 속담 진짜 오랜만에 쓰네요. 네, 그만큼 조급하고 답답하고 미치겠는데. 하긴 해야겠고….
결국 유턴을 선택하기로 했어요. 유턴이란 것이 가기로 한 도착지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도착지로 가는 길을 바꾸는 것이 잖아요. 네, 방향을 조금 바꿔버렸어요. 오일파스텔은 아직 저에게 너무 어려운 것임을 인정하고, 짧은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그림으로 바꿨어요. 바로 아이패드 드로잉. 그래도 작년부터 끄적끄적 그리던 습관이 있어 오일파스텔보다는 익숙하고 시간 안에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림종류가 바뀌니 글 주제도 싹! 바뀌었어요. 다행히 조금 서툰 글이라도 있어서 부족하지만 기간 안에는 어떻게든 마무리할 수 있을 듯싶어요. 진짜 기간 안에 잘 마무리하고 싶네요.
유턴이라도 했기에 조금이라도 기대라는 것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유턴을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지기(知己)’때문이에요. 지기가 있어서 나 자신의 수준을 알았고, 너무 늦기 전에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림 있는 책’ POD 출판이라는 새로운 도전이 험난한 파도에 지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있는 거예요. 이왕 버티는 거 끝까지 버텼으면 좋겠네요. 사실 간당간당하지만요.
이번 영하의 날씨 역시 너무 좋은 내용이었어요.~
‘지기(知己)’. 김영하 작가의 ‘영하의 인생사용법’ 다섯 번 이야기는 바로 지기이다. 손자병법 모공 편에 지피지기 백전불태는 백 번 이긴다는 백전백승이 아니라. 위태롭지 않게 한다. 곧, 지지 않는다는 뜻임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