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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Soobin Oct 04. 2022

일이 사랑이 되고, 사랑이 일이 될 수 있을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초가을 날씨였다. 카메라와 우산을 챙기고 서울 양천구에 있는 장애인권교육센터로 향했다. 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양천구청 인근을 돌아다니며 장애물이 될만한 것들을 발견하기로 했는데, 비가 내리는 걸 보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취소되려나 싶었던 내 예상과 달리, 센터장님은 비를 반기는 눈치였다. “비가 오면 오히려 좋죠. 더 불편하잖아요. 우리가 불편함을 느낄수록 더 많은 걸 개선시킬 수 있겠죠? 그러니 얼른 나갑시다.”  


실제로 그날 우리는 많은 것을 발견해냈다. 이름하여 ‘UD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배리어 프리 마을을 만들기 위해 기획한 협업이었다. 첫 모니터링이 어색해 허둥대는 나와 달리, 활동가 분들은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장애물이 없는지 체크했다. 촬영을 맡은 나는 그들이 가리키는 대로 카메라 렌즈를 가져갔다. 공원에 있는 시계탑은 어린이의 시각에서 너무 높았고, 놀이터에 있는 미끄럼틀에는 계단이 있어 휠체어 사용자가 접근하기 불편했다. 활동가들은 곳곳에 숨어있는 불편함을 발견할 때마다 눈을 반짝였고, 그런 그들의 태도는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그래도 일은 일일 텐데, 비가 오면 상대방이 말하는 소리도 잘 안 들리고 우산도 들어야 해서 여러모로 불편할 텐데 말이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모니터링이 끝나고 센터로 돌아온 우리는 뒤이어 유니버설 디자인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어떤 사례가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나갈 때쯤, 센터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눈을 감고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려 보세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편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느끼고 관찰하다 보면, 유니버설 디자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한테 유니버설 디자인은 곧 사랑인 거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불현듯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날, 엄마 어깨에 기대어 한참을 쫑알거리던 날이었다. “예전에 탄 00번 버스 있지, 매연 냄새도 너무 심하고 운전도 거칠어서 오는 내내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다 나른해진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문득 눈을 떠보니 엄마가 휴대폰으로 메모를 하고 있었다. 00번 버스, 매연, 과속 … 불편… 전화번호 xxx-xxx-xxxx.  


괜스레 멋쩍은 기분이 들어 다시 눈을 감아버렸지만, 손가락 하나로 토독토독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는 엄마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엄마에게 그것은 일이었지만, 또한 사랑이었으니까.  



사랑이라는 필터를 가진 채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또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느 날은 밤에 산책을 하다 벤치 하나를 발견했는데, 모양이 퍽 신기해 오랫동안 관찰한 적이 있다. 보통의 벤치는 각진 네모 형태라거나 소위 ‘의자’처럼 생겼는데, 이 벤치는 등받이는 따로 없지만 한쪽 끝부분이 미끄럼틀처럼 아래에서 위로 부드럽게 곡선처리가 되어 있었다. 왜 한쪽이 곡선으로 나 있는 걸까 하고 의아해하다 문득, 동네에 반려동물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산책을 하는 반려동물들이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설계된 벤치였다. 다리가 불편한 반려동물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디자인이었다.  


지금껏 나는 ‘돈 아니면 워라밸’이라는 기준으로 직장을 고르고 직업을 고민해왔다. 그러다 센터장님의 말을 듣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우리가 일을 선택하는 전부인 걸까?’ 가을비가 구슬 대며 내리던 그날, 내가 활동가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돈도 아니고 워라밸도 아닌, 사랑이었다. 엄마가 하고자 했던 일 또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굴곡진 벤치도 기존의 것을 편하게 이용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사랑에 관한 제목을 가진 책을 따로 수집할 정도로 사랑을 좋아하는데, 왜 일에서는 사랑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직장과 직업이란 모름지기 부와 명예와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일은 일이고 나는 나라고만 생각했던 내게 센터장님의 말은, 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전환점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키워드가 있다. 일을 고를 때도, 관계를 주고받을 때도. 일생을 살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나만의 키워드가 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돈일 수도, 성장일 수도 있다. 무소속 노동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키워드를 바탕으로 일에 관한 기준과 태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나의 키워드는 ‘사랑’과 ‘돌봄’이다. 나는 사랑을 바탕으로 내 일상을 돌보고, 일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그렇기에 서로를 돌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그래서 내게 일은 사실 삶이나 다름이 없다. 분리될 수 없다.(물론 일이 삶보다 우선되면 안 되겠지만)


일이 사랑이 되고, 사랑이 일이 될 수 있을까? 일과 사랑, 일과 돌봄이 만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업이 있지만,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일들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돈이든 명예든 저마다의 직업관은 마땅히 존중받아야겠지만, 가능한 사랑과 돌봄이 지금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며 일할 수 있는 직업이 지금보다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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