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격의 발현
외교外交는 국제사회에서 교섭을 통해 국가와 국가 간에 맺는 일체의 관계를 뜻합니다. 유사 이래 외교는 국익 실현의 수단으로 으뜸가는 국책國策 중 하나였어요. 우리는 지금 불확실성의 시대(the era of uncertainty)를 넘어섰죠. 미래 예측이 극히 어려운 초불확실성의 시대(the era of hyper-uncertainty)를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끝을 보지 못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만 보더라도 소용돌이치는 국제정세를 가늠하기란 극히 어려워요. 생존을 위해 국가의 외교력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골품제骨品制º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고대 삼국 중 신라新羅에 존재했던 독특한 신분제도로, 개인의 골품 즉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개인의 영달은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특권과 제약이 규정된 폐쇄적 신분제도였습니다. 오죽하면 신라 말 6두품 계층은 신라에서 출세는 글렀음을 판단하고 중국의 당唐으로 건너가 출세를 도모했겠어요. 그들은 결국 고려 건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죠.
무열왕武烈王(신라 제29대 왕, 재위 654~661) 김춘추金春秋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애초에 골품제로 따지면 결코 왕에 오를 수 없는 진골眞骨이었어요. 그러나 긴박했던 7세기 동북아 정세 속에서 김유신金庾信이라는 걸출한 인물과 손을 잡아 정권을 장악하였고, 진덕여왕眞德女王(신라 제28대 왕, 재위 647~654) 사후 성골聖骨의 대가 끊기면서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됩니다.
김춘추의 능력 중 널리 회자되는 것이 바로 외교력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대야성 전투에서 자신의 딸과 사위를 죽인 철천지원수 백제百濟를 제압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왜倭와 고구려高句麗, 당唐을 오가며 군사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당과의 연맹을 성사시킵니다.ºº 그 결과 고대 삼국 중 가장 늦게 성장했던 신라는 늘 국력에 있어 우위에 있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제압하고, 한반도의 첫 통일 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죠.
외교를 통한 구국의 영웅은 고려高麗에도 존재했습니다. '외교 담판'으로 너무나 유명하죠. 바로 고려 성종成宗(고려 제6대 왕, 재위 981~997) 때 인물 서희徐熙입니다. 서희는 젊은 시절 오랜 시간 교류가 두절되었던 중국의 송宋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의 물꼬를 트는 등 일찌감치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한 인물이었어요. 특히 서희의 대 거란 외교 담판은 한국사 관련 시험의 대표 기출키워드일 만큼 고려사의 빅이슈입니다.
왕건王建(고려 제1대 왕 태조, 재위 918~943)은 후삼국 통일 후 송과는 화친하고 거란은 배척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친교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거란은 고려의 대외정책에 불안을 느끼고 993년 소손녕蕭遜寧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거란의 진짜 목적은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삼아 향후 있을 송과의 전면전에서 배후를 안정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한 서희는 고려와 거란이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그 중간에서 방해가 되는 여진을 물리치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만 가능하다는 조건을 내겁니다. 거란은 고려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고려가 압록강 근처 영토를 개척하는 것도 동의하고 물러나요.
침략군을 전쟁 없이 돌려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토까지 얻어낸 서희의 외교술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외교라 평가받습니다. 그의 정확한 통찰력, 타고난 언변, 고려를 압도하는 대군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 대담함은 역사에 보기 드문 영웅이라 할 만합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는 두 번 말하면 입 아플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 가치를 십분 살려 대국들 사이에서 최고의 국익을 끌어내야 하죠. 작지만 강한 나라, 당당하고 굴종 없는 외교를 지향해야 합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는 되풀이되어선 안 되겠지요.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º골품제: 골품제는 왕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신분 성골聖骨을 필두로,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나 왕이 될 자격은 없었다고 하는 진골眞骨, 그 밑에 6두품부터 1두품에 이르는 6개의 두품까지 모두 8개 신분계급으로 나뉘었습니다.
ºº백제 의자왕義慈王(백제 제31대 왕, 재위 641~641)은 즉위 초 신라에 공세적인 정책을 취합니다. 대야성 전투는 그 정책의 절정에 있었던 사건이었죠. 642년에 의자왕은 장군 윤충으로 하여금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당시 대야성의 성주 김품석이 바로 김춘추의 사위였어요.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김품석과 아내 고타소랑은 목숨을 잃고 말았죠. 김춘추의 백제를 향한 원한은 상상 이상이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