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서避暑

태양을 피하고 싶어서

by goeunpa

올여름 더위가 심상치 않습니다. 온 나라가 찜통 수준이에요. 며칠 전엔 경기도 여주 날씨가 40도를 넘었다는 뉴스 기사를 봤습니다. 역대 최고 무더위로 꼽히는 2018년을 이미 넘어선 상태라고 하네요. 2018년보다 더 최악의 상황인 것은 올해는 습기까지 많아 동남아 수준의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점이라 합니다. 인명 피해도 속출하고 있다고 하니 모두들 건강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요.


‘피서避暑’란 문자 그대로 ‘더위(暑)를 피한다(避)’는 뜻입니다. 여름철 무더위를 피하여 시원한 곳을 찾는 풍습을 말하죠. 현대인들은 굳이 계곡이나 그늘을 찾을 필요 없이 실내에서 에어컨이나 선풍기에 의지해 더위를 피할 수 있지만, 문명의 이기에 의존할 수 없었던 과거의 피서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선인들에게서 찾아봅시다.


탁족

정약용丁若鏞은 1824년 여름에 쓴 시 ‘소서팔사消暑八事’에서 여덟 가지 피서법에 대해 읊고 있습니다. ‘소나무단에서 활쏘기, 홰나무 그늘에서 그네 타기, 빈 누각에서 투호 놀이, 시원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서쪽 못에 핀 연꽃 감상,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 듣기, 비 오는 날 운자 뽑아 시 짓기, 달밤에 물에 발 담그기’ 등이 그것입니다. 정약용 역시 예부터 선비들의 전통적 피서법이었던 탁족(濯足)을 언급하고 있네요.


한여름 더위를 피해 시원한 그늘 아래의 차디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어 보셨나요? 절로 땀이 식고 온몸이 시원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옛 선비들에게도 탁족은 최고의 피서법이었어요. '아랫것'들이 하듯 아무 데서나 발가벗고 경거망동할 수 없었던 '배운 분'들은, 강이나 계곡과 같이 차가운 물에 발만을 담그고 자연의 품속에서 열을 식히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탁족'의 어원이 『맹자孟子』의 한 구절에서 온 것이니만큼 선비들에게는 썩 잘 어울리는 것이었네요.

조선 시대 화가 이경윤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탁족도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보양식

음력 6월과 7월 사이 제일 더운 절기를 복날 또는 삼복三伏(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이라고 하죠. 더위에 지치면 입맛을 잃고 건강을 해치기 쉽습니다. 무더위에 건강을 잃지 않기 위해 열흘 간격으로 찾아오는 복날에는 지친 몸을 보하고 남은 여름을 잘 이겨내기 위해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여 먹는 풍습이 있었어요. 조선 후기 세시풍속을 정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삼복에 개고기로 만든 구장狗醬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도 이기고 보신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 유래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언급합니다. 구장狗醬 외에도 동지 때 음식으로 알려진 팥죽을 삼복에도 먹었다고 전합니다. 먹는 음식을 통해 더위를 이겨내고자 노력한 모습들이라 할 수 있겠네요.


독서

일득록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정조正祖(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의 어록을 전하는 『일득록日得錄』*을 보면 그가 더위를 어떻게 이겨내고자 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무더운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한 신하가 왕에게 좀 더 시원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시라 청합니다. 이에 정조는 “현재 장소를 버리고 좀 더 서늘한 곳으로 옮기면, 그곳에서도 참지 못하고 더 서늘한 곳을 찾을 것”이라고 하며, “참고 견디면 지금 있는 곳이 서늘한 곳이 된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범인凡人과는 달랐던 정조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범상치 않은 정신력으로 더위를 이겨낸 정조는 호학好學의 군주답게 독서를 더위 피하는 방법의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신하에게 "독서를 하면 마음에 주재主宰가 있어 바깥의 기운이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설명하며, "더위를 이기는 데 독서만큼 좋은 것은 없다"라고 설파했어요. 그는 자신의 독서 피서법이 그저 왕의 잔소리가 아님을 본인 스스로가 한여름 정무를 보는 틈틈이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증명했습니다. 언행일치의 군주였네요.


기록적 폭염이 이어지는 요즘입니다. 에어컨도 좋지만 책 한 권 들고 옛 선비들처럼 계곡을 찾아보시죠? 계곡물에 발 담그고 앉아 자연에서 힘든 현실을 잠시 잊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거창할 것 없는 최고의 피서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 『일득록日得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된 『일성록日省錄』과 이름이 비슷하죠? 둘 다 정조 관련 기록인 것도 같습니다. 『일성록日省錄』이 국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사항을 수록한 정무일지라면, 『일득록日得錄』은 정조가 경연經筵(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학문이나 기술, 국정을 협의하던 일)이나 기타 행사에서 신하 또는 유생들과 나눈 대화를 수록한 강론집입니다.


※ main photo by stux_pixabay

keyword
이전 04화대수大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