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현대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정치 형태는 정당政黨정치입니다. '정당'은 정권 획득 및 정치적 이상 실현을 위해, 동일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이 모여 조직하는 단체를 뜻합니다. 우리나라 「정당법」에서는 정당을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고 공직선거의 후보자를 추천 또는 지지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함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의 자발적 조직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죠.
현대의 정당이 조선 중기 붕당朋黨(당파)과 다른 점은 그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당은 일정한 목적의 정강정책을 국민 앞에 제시하고 호소함으로써 폭넓은 지지를 받아야만 정권을 획득할 수 있어요. 폭도로 대변되는 불법적 이익집단과 구분되는 점이기도 합니다.
정치에서의 갈등과 대립, 분쟁 등을 정쟁政爭이라고 합니다. 정쟁의 역사는 ‘국가’의 탄생과 함께 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죠? 바로 앞서 잠깐 언급한 ‘붕당’ 혹은 ‘붕당정치’입니다.
조선시대의 붕당 간 다툼, 당파 싸움에 대한 인식은 최근까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여전히 ‘붕당정치’를 조선을 망하게 만든 망국병으로 여기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부정적 인식 형성의 원인을 좀 살펴볼까요.
15세기말, 기성 관료 집단인 훈구파勳舊派*1를 비판하며 대두한 세력이 사림파士林派*2입니다.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경계한 훈구파에 의해 16세기 4차례나 큰 사화士禍가 일어났음에도,*3 사림파는 쉽게 꺾이지 않았고 결국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어렵게 잡은 권력이었지만 사림파 내에서 학문적 연원의 차이, 정치적 노선의 차이에 따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끼리 뭉치게 되면서 붕당이 형성되었습니다.
조선은 애초에 국왕 중심의 왕조국가였습니다. 붕당 형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죠. 그러나 조선 사대부들의 근간이었던 성리학性理學(주자학)에서는 붕당의 존재를 긍정했어요. 성리학의 붕당론에서는 ‘군자는 군자끼리 붕을 이루고, 소인은 소인끼리 붕을 이루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 주장하며, ‘임금은 소인의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붕당을 기용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사림파는 주자의 붕당론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정치활동에 활용했던 것이라 볼 수 있죠.
선조宣祖(조선 제14대 왕, 재위 1567~1608) 때 동서東西로 나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300년 붕당정치가 시작됩니다. 당시 조선의 관직 중 이조전랑吏曹銓郞이라는 자리는 문관의 인사에 있어 막강한 권한과 특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갈릴 수 있었죠. 선조 때 이 자리를 두고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 간 다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때 조정 인사들 중 김효원을 지지했던 신진 관료들이 동인東人, 심의겸을 비롯한 기성관료들이 서인西人*4으로 나뉘면서 조선에서 항구적인 당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서 분당 이후 각각의 붕당 안에서는 또다시 분당이 일어납니다. 동인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서인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었죠. 붕당 간의 대립은 백성의 안위보다 주로 조정의 복상服喪 문제나 세자 책봉 등을 두고 일어났습니다. 민생과 동떨어진 싸움만 벌이는 모습이 현대의 무엇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네요.
붕당 간의 정치 투쟁이 격화되며 커다란 폐단으로 지목되자 영조英祖(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1776)와 정조正祖(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는 당파 간의 균형을 추구하는 탕평책을 시행하여 당쟁 해소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노론의 집권이 길어지면서 세도정치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세도 정치로 인해 조선은 패망의 길로 본격 접어들게 되었죠.
조선 붕당 정치의 폐단을 집중 부각한 것은 일제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이 지리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본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강대국의 권위에 의지하는 민족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외치며 당쟁의 반복적인 대립 양상과 잔인함만을 크게 부각했습니다. 이토록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고 분열만을 일삼는 한민족을 일본 제국이 발전시켜주어야 한다며 식민 통치 합리화 이론으로 붕당 정치를 이용하였죠.
이 인식은 꽤 오랜 시간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되었지만, 광복 후 우리 학자들은 조선의 당쟁이 조선 정치사 전체를 꿰뚫는 것이 아닌, 하나의 중요한 줄기인 것으로 파악하고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과 연관시켜 연구하였습니다. 붕당 정치로 인한 사화와 당쟁은 조선이 추구한 문치정치에서 나타난 권력투쟁의 일부이고, 17세기 이후 세도정치 이전의 당쟁은 공론에 입각한 상호비판과 상호견제를 통한 붕당정치였다고 본 것입니다.
정치적 논쟁은 없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죠. 논쟁을 통해 국민의 삶과 나아가 이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각양각색의 의견과 대립, 논쟁이 벌어질 수 있고 그래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대표하는 정당들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나요?
*1) 훈구파: 조선 초 세조世祖(조선 제7대 왕, 재위 1455~1468) 때 이후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되고 고위 관직을 역임한 인물들이 형성한 지배층이다.
*2) 사림파: 조선 중기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를 주도한 지배층으로, 성종成宗(조선 제9대 왕, 재위 1469~1494)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중앙 정계로 진출시켰다.
*3)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4) 동인, 서인 : 당시 김효원의 집이 한양의 동쪽, 심의겸의 집이 한양의 서쪽에 위치했기에 붙여진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