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5대 궁궐 이야기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궁궐宮闕은 임금의 통치공간이자, 그 가족의 생활공간이었어요. ‘궁’은 왕이 거처하며 정무를 보는 곳, ‘궐’은 궁성, 궁의 망루 등을 일컫는 말로 ‘궁궐’은 이 두 가지를 합쳐 부르는 것이죠. 조선시대 이전의 궁궐 건축사는 전하는 것이 적어 현재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요. 그러나 다행히도 가장 최근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 궁궐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거치면서도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의 5대 궁궐을 둘러보러 가볼까요?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의 정궁正宮으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조선 제1대 왕, 재위 1392~1398)가 1395년 완공했어요. ‘경복궁’이란 이름은 정도전鄭道傳이 『시경詩經』 「주아周雅」의 내용을 근거로 지은 것으로, 그 외 여러 전각의 명칭 또한 정도전이 명명했어요. 경복궁에는 공식 연회 장소로 쓰였던 경회루慶會樓가 있는데, 연못 위의 그 모습이 매우 빼어나 경복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명실상부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버린 뒤 폐허로 남아 있다 고종 때 중건하였지만, 이미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대부분의 왕들이 창덕궁에서 주로 생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정궁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죠.
창덕궁昌德宮은 태종太宗(조선 제3대 왕, 재위 1400~1418) 5년(1405년)에 선왕인 정종定宗(조선 제2대 왕, 재위 1398~1400) 때 개성으로 옮긴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되돌리면서 경복궁의 이궁離宮(임금이 정사를 보는 정궁 이외에 따로 지은 궁궐)으로 지은 것이에요. 창덕궁 역시 임진왜란 때 대부분이 소실된 뒤, 선조宣祖(조선 제14대 왕, 재위 1567~1608)에 의해 복구가 시작되어 광해군光海君(조선 제15대 왕, 재위 1608~1623) 때 완료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때(1623) 다시 한번 대부분의 전각이 타버리는 아픔을 겪고 맙니다. 독창적인 건축미로 인해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란 평을 듣는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고종 때까지 중건되지 못한 경복궁을 대신해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하였으며,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어요.
창경궁昌慶宮은 세종世宗(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 때 상왕上王 태종을 위해 지었던 수강궁壽康宮을 토대로 세워졌어요. 성종成宗(조선 제9대 왕, 재위 1469~1494)이 이곳에 여러 전각을 더 지은 뒤 창경궁이라 명칭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궁궐의 모습을 갖췄고, 임진왜란 후 창덕궁의 이궁으로 기능하였죠. 잦은 화재와 수리로 부침이 잦았던 이곳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 것은 일제에 의해 창경원昌慶園으로 격하된 사건 때문이에요. 일제는 창경궁의 건물을 대부분 헐어버리고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한 뒤 이름을 창경원이라 짓습니다. 일제의 의도는 왕실 권위의 상징인 궁궐을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오락공간으로 깎아내림으로써 국왕의 위엄과 국권을 짓밟으려는 것이었죠. 뼈아픈 역사를 간직한 창경원은 1983년 동물원을 이전하고 계속된 복원공사 속에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어요.
경희궁慶熙宮은 본래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렸으며, 광해군 때 창건했어요. 임진왜란 이후 행궁에 임시로 거처하던 광해군은 창덕궁 중건을 완료한 뒤에도 옮기기를 꺼려했고, 재건한 지 5년이 지나서야 창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이토록 창덕궁을 꺼린 이유는 그곳에서 좋지 않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 때문이에요. 실제로 창덕궁은 세조世祖(조선 제7대 왕, 재위 1455~468)에 의해 쫓겨난 단종端宗(조선 제6대 왕, 재위 1452~1455)이 머문 곳이었고,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연산군燕山君(조선 제10대 왕, 재위 1494~1506)이 붙잡힌 곳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가 발생한 곳 역시 창덕궁이었죠. 결국 새로운 궁을 원했던 광해군에 의해 경덕궁이 세워졌으나 정작 광해군은 이곳에 들지 못한 채 인조仁祖(조선 제16대 왕, 재위 1623~1649)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영조英祖(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1776) 때 이름을 경희궁으로 고쳤고, 궁궐의 규모가 상당하여 동궐東闕이라 불리던 창덕궁과 함께 서궐西闕로 불렸어요. 경희궁은 일제에 의해 중심 건물이 헐려나가거나, 여러 전각이 이곳저곳으로 옮겨지면서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고, 그 정도가 심각하여 복원공사가 진행된 지금도 영광스러웠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남긴 상처가 이렇게나 깊습니다.
근현대의 중심 무대였던 덕수궁德壽宮의 원래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었어요. 월산대군月山大君(세조의 큰 손자)의 사저였던 곳을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주하며 행궁으로 삼았고, 광해군 역시 이곳에서 즉위했죠.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긴 뒤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게 됐어요. 인조반정 이후 규모가 축소되었던 경운궁은 고종高宗(조선 제26대 왕, 재위 1863~1907)이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거처로 삼으면서 다시 그 규모가 확장되었으며, 대한제국 수립 이후 정궁으로 기능했어요.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순종純宗(조선 제27대 왕, 재위 1907~1910)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뒤 고종이 거주하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덕수궁은 애초에 궁궐로서 지어진 것이 아닌 개인의 사저였어요. 그 때문에 전각 배치에 있어 다른 궁궐과 같은 질서 정연함이 없고, 근현대의 무대답게 석조전石造殿, 정관헌靜觀軒과 같은 서양식 건물로 인해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내죠.
절기상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났지만, 여전히 폭염의 기세는 등등하기만 합니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했어요. 뜨거운 여름날, 도심 한복판의 답답하고 뜨거운 열기를 피해 궁궐의 처마 밑 그늘로 잠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더불어 궐내의 고즈넉함은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 중 하나라고 장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