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군暗君의 그림자
세상에는 일찍이 간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다만 현명한 임금이 그것을 잘 살피고 부림으로써 나라를 바른 길로 이끌었기에 멋대로 술수를 부릴 수 없었다. 만약 간신의 술수에 빠지면 나라가 패망에 이르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 『고려사高麗史』
위 글은 조선 세종世宗(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 때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등이 편찬한 『고려사高麗史』 간신열전姦臣列傳 서문입니다. 간신이 횡행한 시대라면 이는 곧 암군의 치세기라 할 수 있겠죠. 간신과 암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 속 콤비’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역사에도 수많은 간신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거나 어리석은 군주의 치세기면 반드시 등장하여, 끝내 역사에 오명을 남긴 채 사라졌어요. 권신權臣과 간신은 양날의 검이었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간신으로 변모하기란 너무도 쉬웠으나, 간신이 다시 ‘정신을 차린’ 역사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내용이죠.
고려 공민왕恭愍王(고려 제31대 왕, 재위 1351~1374), 우왕禑王(고려 제32대 왕, 재위 1374~1388) 때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은 『고려사』 간신열전에 실린 인물입니다. 그의 조부는 고려 말 무려 4명의 왕을 모시며 청렴함과 강직함으로 이름이 높았던 이조년李兆年이었습니다. 고려 말 최고의 간신이라 평가받는 이인임의 조부가 손자와는 반대로 청렴과 강직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하니 아이러니한 역사의 한 단면이네요.
이인임은 공민왕 때 고려에 침입해 온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최유崔濡 등이 충선왕忠宣王(고려 제26대 왕, 재위 1308~1313)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옹립하려 일으킨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습니다.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죠.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공민왕은 집권 초기 반원정책을 펼치며 고려의 재건을 위해 과감한 개혁을 이끈 영민한 왕이었어요. 공민왕이 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죽음으로 정사에서 손을 놓고 방황하기 전까지, 이인임은 공민왕의 충직한 신하로서 뛰어난 정무 감각과 문무 겸비 능력을 앞세워 고려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끝내 재위 초반의 모습을 잃고 말았고, 측근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인임은 본능적으로 권력의 향배를 판단하게 됩니다. 그 좋은 능력이 결국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말죠.
그는 발 빠르게 공민왕 시해사건의 역신들을 처단한 후 공민왕의 유언을 받든다는 명목하에 10세의 어린 강녕대군江寧大君(우왕)을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공민왕이 이인임에게 실제로 후사와 관련한 유언을 남겼는가는 이인임만이 아는 것이었고, 그는 권력을 오로지 하면서 기어이 자신의 세상을 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비참하게 아버지를 잃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천성이 포악하고 여색을 좋아하여 국정을 이인임 등의 세력가들에게 맡기고 주색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의 엽색행위가 얼마나 지나쳤는지 이를 보다 못한 최영崔瑩이 우왕의 행위를 고려의 역대 왕 중 최악의 패륜아인 충혜왕忠惠王(고려 제28대 왕, 재위 1330~1332)에 빗대어 간언할 정도였죠.
이인임은 꼭두각시 우왕을 두고 권문세족의 수장으로서 공민왕이 펼쳤던 반원정책에 반하는 친원親元으로 돌아서버렸고, 친명을 추진하던 신진사대부를 대거 숙청했습니다. 그의 심복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은 이인임의 권력을 믿고 매관매직, 토지수탈 등 전횡을 일삼으며 고려 사회를 멸망의 지름길로 인도하고 있었죠.
이인임은 우왕 12년(1386)에 노환을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그의 측근들에 의한 부정부패는 그칠 줄 몰랐고,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최영과 이성계가 나서게 됩니다. 고려 최고의 무장 최영과 새로이 떠오른 별이었던 이성계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인임 세력을 일거에 숙청하여, 임견미와 염흥방은 참수되었고 이인임은 목숨만은 부지한 채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왕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고려를 좌지우지하던 최고의 권력자는 찾는 이 하나 없는 유배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죠.
이인임이 세력을 잃자 그에 대한 탄핵이 이어졌습니다. 공양왕恭讓王(고려 제34대 왕, 재위 1389~1392) 즉위 후 이인임이 이미 죽은 뒤임에도 다시금 오사충吳思忠 등이 이인임의 극형을 간언하자, 왕은 이인임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를 파 연못으로 만들라 지시했습니다. 이 파가저택破家瀦澤은 대역죄인을 극형에 처한 뒤 그 집터마저 없애버리는 형벌이었어요. 그의 살아생전 전횡에 얼마나 많은 분노가 쌓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옛말에 ‘군자가 여럿이어도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기란 어렵지만, 나라를 망치는 데에는 소인 하나면 족하다’고 했습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 위기의 한국을 이끌 지도자는 소인을 멀리 하고, 간신을 구별할 줄 아는 이라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간신열전의 서문을 음미할 만합니다.
"세상에는 일찍이 간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다만 현명한 임금이 그것을 잘 살피고 부림으로써 나라를 바른 길로 이끌었기에 멋대로 술수를 부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