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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서는 안 되는 그들

독립운동가

by goeunpa
메인사진: 서울 진관사 태극기. 2009년 서울 은평구 진관사 부속건물인 칠성각 해체·복원 과정 중 발견된 것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를 그려 넣었다는 점입니다. 1919년 발행된 독립신문류와 함께 발견되어 그즈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1919년 제작된 실물이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자료 국가유산청)


일제강점기 소리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중 우리가 아는 건 교과서에 전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저 역시 매달 발표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볼 때마다 늘 새로울 뿐이라 때때로 죄송스러울 때도 있습니다.*1

이달의 독립운동가.png 2024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포스터 (자료 국가보훈부)

2017년에 개봉한 영화 중 독립운동가 박열 선생을 다룬 영화 <박열>이 있었습니다. 흥미가 생겨 관련 정보를 찾던 중 그가 일제에게 구속된 지 22년 2개월 만에 홋카이도北海道의 아키다秋田 형무소에서 출소할 당시 그를 환영하는 인파가 1만 5000명이나 모였었다는 기록을 보게 됐습니다.*2 그만큼 당시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이 컸다는 반증이겠죠. 그러나 그에 비해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 그의 이름과 행적은 너무도 빨리 잊혔습니다.


이번에는 광복절이 있는 8월을 맞아 박열 선생처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바쳤으나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간 두 분에 대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배우 하정우는 쌍권총의 달인 ‘하와이 피스톨’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습니다. 영화 속 '하와이 피스톨'의 모습은 실제로 쌍권총을 들고 일제의 경찰과 단신으로 총격전을 벌였던 김상옥金相玉 선생의 활약상과 매우 비슷합니다(이제 보니 선생의 사진과 배우 하정우의 영화 속 모습이 콧수염을 비롯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요).

김상옥.jpg 1920년대에 촬영한 사진. (자료: 독립기념관)

대한제국 시절 군관을 지낸 아버지의 무골적 기질을 물려받은 덕인지, 김상옥은 3·1 운동 당시 여고생을 베려던 일본 경찰을 쓰러뜨린 후 검을 빼앗아 자신이 보관할 정도로 대담무쌍했습니다.*3 선생은 친일파 암살단을 조직하여 친일파 숙청을 진행하며 조선총독 제거와 일제기관 파괴 등을 계획하던 중 함께 하던 한훈과 김동순이 붙잡히자 상하이로 망명했어요.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그곳에서도 의열단에 가입하는 등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의 불을 꺼뜨리지 않았죠.*4

1-000931-000_1.jpg 김상옥 의사 노획 일본도 (자료: 독립기념관)

1922년 12월 상해 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한 달 뒤인 1923년 1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단행했습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된 선생은 은신처를 포위한 일본 경찰을 따돌리는 와중에도 쌍권총으로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힌 채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케 했습니다.


선생의 은신처를 다시 찾아낸 일본은 무려 1000여 명(4백여 명이라고도 전함)의 인원을 동원하여 선생을 포위했습니다. 선생은 쌍권총을 든 채 지붕을 넘나들며 혈혈단신의 몸으로 일제의 군경과 4시간 가까이 총격전을 벌인 끝에 결국 총알이 다 떨어지자 마지막 한 발로 장렬한 자결을 택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선생의 시신에서 11발의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해요. 전근대에 태어났다면 가히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장수가 되고도 남지 않았을까요?


독립운동가의 면면을 보면 지도층 인사보다 오히려 어려운 환경이거나 높지 않은 신분임에도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이들이 굉장히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을사오적乙巳五賊과 같이 이름 있는 고관대작 중에는 충의를 지키기보다 일제에 아첨하여 부귀영화를 추구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명문세가名門世家 중에도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 있었어요.

2024-08-22 08 59 17.png 우당 이회영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이회영李會榮 선생은 우리에게 ‘오성과 한음’으로 익숙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손으로 그의 집안은 정승과 판서, 참판을 수두룩하게 배출한 손꼽히는 명문가였습니다. 선생은 스무 살 때부터 집안의 노비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였고, 나중에는 모두 면천, 해방시키는 등 남다른 모습을 보여줬어요.

2024-08-22 08 54 01.png 서울 명동의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터 (자료: 『명동; 공간의 형성과 변화』;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으로 인해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국권을 상실하는 치욕을 겪게 되자, 선생의 주도로 집안의 여섯 형제는 현재 시가로 600억 원에 이르는 재산을 모두 처분한 뒤 식솔들을 거느리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조국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그들은 하루 한 끼조차 먹기 힘들 정도로 힘든 중국 생활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죠.


독립협회를 통한 민중계몽운동 전개, 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조직, 만주에 독립운동기지인 삼원보 설립,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선생과 그의 가족들은 이처럼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지만, 최후는 비통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형제 중 셋은 중국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 속에 순국하였고, 선생 역시 65살이던 1932년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기 위해 상하이上海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중 일제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였습니다. 만주로 떠났던 여섯 형제 중 살아 돌아와 광복을 맞이한 것은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을 지낸 다섯째 이시영 선생뿐이었어요.

111.png 이회영 선생의 유품 (자료: 독립기념관)

영화 <박열>에서 관동대학살을 조장한 일제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박열을 향해 "사형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살아남아 자신이 잊혀 가는 것을 목도하라!"며 조롱의 말을 내뱉습니다. 진정 그것이 일제가 노렸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며 섬뜩했죠. 광복을 맞은 지 채 1세기가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스러져 간 선조들을 기리며 8월만이라도 지금 우리의 삶이 독립된 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선인들이 흘린 피 위에 세워진 것임을 틈틈이 상기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 역시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1)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국가보훈처에서 1992년부터 매년 열두 명 이상의 독립운동가를 월별로 선정하여 발표하는 독립운동가 명단입니다. 2024년 8월의 독립운동가는 여성 독립운동가 곽낙원, 임수명, 이은숙, 허은 선생입니다.

*2) 영화의 말미에 당시 모인 인파의 사진이 나옵니다.

*3) 당시 선생이 빼앗은 일본 경관의 군도軍刀는 현재 독립기념관이 보관하고 있어요.

*4) 의열단은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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