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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의 원흉 혹은 역사의 희생양

백제 의자왕

by goeunpa
메인사진: 부여왕릉원. 부여 능산리산 남쪽 경사면에 있는 백제 무덤들입니다. 이곳에는 의자왕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북망산의 흙을 가져와 조성한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의 가묘가 있습니다. (자료 국가유산청)


의자왕義慈王(백제 제31대 왕, 재위 641~660)은 무왕武王(백제 제30대 왕, 재위 600~641)의 맏아들로 용감하고 과감했으며, 담대하고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의 재위 33년(632)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의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1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들로 하여금 성에 올라 당唐의 깃발을 세우게 하자, (왕자) 태泰는 다급히 성문을 열고 목숨을 보전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이르러 왕과 태자 효孝가 여러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소정방은 왕과 태자 효, 왕자 태·융隆·연演과 대신·장사 88명, 백성 1만 2807명을 당의 수도로 압송하였다. … 왕이 병으로 죽었다. …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 진숙보陳叔寶의 묘 옆에 장사 지내고, 아울러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2


태자 시절과 즉위 초반,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백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 그러나 종국엔 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남자. 바로 백제 의자왕 이야기입니다. 위에 인용한 두 기록은 의자왕이 즉위하던 때와 백제가 멸망하던 때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타국의 수도에서 병사하였고, 자신과 비슷한 최후를 맞은 이들의 옆에 묻혔습니다.*3 전형적인 패망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의자왕은 사서에서 전하듯 정말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왕이었을까요?


우리나라나 중국 사서에서 평하는 의자왕의 초반 평가는 대단히 후합니다.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난 의자왕은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들과의 우애도 남달라 해동의 증자로 불렸습니다. 즉위 후 그가 보여준 모습은 역대 훌륭한 왕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죠.


대내적으로는 친인척 숙청 작업을 단행하여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한편, 죄수들을 풀어주고 나라의 여러 곳을 다니며 백성들의 안위를 살폈고, 대외적으로는 친고구려 정책을 통해 외교적으로 신라를 압박함과 동시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요충지인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는 성과를 거두며 정복 군주의 능력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이외에도 당·왜와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려 애쓰는 등 이대로라면 백제의 중흥이 의자왕 때 이루어지리라 생각할 만했어요.

부여 사택지적비. 의자왕대의 대좌평 사택지적이 은퇴 후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입니다. (자료 국가유산청)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15년째인 655년 이후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의 『삼국사기』 기록 대부분은 대궐 남쪽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리고, 수도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하는 등 백제의 멸망을 암시하는 괴이한 사건의 연속입니다. 수많은 변고가 상징적으로 전해주듯 백제는 큰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침입해 온 나·당 연합군에 의해 결국 무너지고 말았죠. 의자왕은 왕자·대신들을 비롯한 12,870명의 백성들과 함께 침략국(당)의 수도로 끌려가 그곳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4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 멸망 후 당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글귀를 탑에 새겨놓아, 한때 '평제탑'이라 불리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자료 국가유산청)

그는 결국 무능한 왕으로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의자왕의 모습을 새롭게 조망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주목됩니다. 2008년 중국에서 백제 웅진 출신으로 당나라 좌위위 대장군까지 오른 예식진禰寔進이라는 인물의 무덤과 묘비가 출토되었는데, 예식진은 우리나라의 어떠한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으나, 그 이름을 중국 측 사료인 『구당서舊唐書』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구당서』에 보면 백제의 대장 예식禰植이 의자왕을 데려와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5 이가 바로 묘지명의 주인과 동일 인물로 추정됩니다.*6 백제의 장수가 강제로 의자왕을 데려와 항복했다는 내용은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한편 2014년에는 의자왕이 마지막으로 항전하기 위해 들어갔던 공산성(백제 시대의 웅진성)의 발굴 조사에서 의례용으로 저수지에 빠뜨린 것으로 보이는 7C 때의 최고급 갑옷과 수백 개의 화살촉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발굴 관계자들은 고대 중국에서도 출정에 앞서 갑옷을 연못에 빠뜨리는 의식을 거행했던 점 등에 비추어 백제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결전의 의지를 다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공주 공산성의 서쪽 문루인 금서루. (자료 국가유산청)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가 당 태종 앞에 치욕을 당한 것이 1364년 전의 9월입니다. 승자인 신라의 입장에서 백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로 기록해야 했을 것이고, 그만큼 기록에서 의자왕의 말년은 불행해야 했습니다. 백제사는 기록의 한계에 허덕이는 현실이지만 보다 다양한 시각으로 의자왕을 이해하려는 연구 성과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1) 『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 第6, 義慈王 卽位年(641).

중국 춘추 시대 학자였던 증자曾子는 공자公子의 제자로 학식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의자왕을 ‘해동의 증자’라고 표현한 내용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중국 『신당서新唐書』의 백제전百濟傳에도 전합니다.

*2) 『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 第6, 義慈王 20年(660).

*3) 손호는 중국 삼국 시대 오吳의 마지막 왕입니다(재위 264~280). 즉위 초반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차 폭정과 주색에 빠져 실정을 거듭하다 진나라 대군의 침략에 결국 항복하였고 오나라는 멸망했어요. 진숙보는 중국 남북조 시대 진陳의 마지막 황제입니다(재위 582~589). 정치를 등한시하고 수隋의 문제文帝가 쳐들어 왔을 때에도 음주와 시 짓는 것을 멈추지 않다가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압송됐습니다. 두 인물 모두 낙양에서 죽고 묻혔습니다.

*4) 『三國史記』 卷28, 『百濟本紀』 第6, 義慈王 20年(660).

*5) 『舊唐書』 卷83, 蘇定方傳.

*6) 拜根興, 2008, 「百濟와 唐 관계에 관련한 두 문제 - 웅진 도독 왕문도의 사망과 예식진묘비명에 관하여」 『百濟硏究』 47,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金榮官, 2012, 「中國 發見 百濟 遺民 祢氏 家族 墓誌銘 檢討」, 『新羅史學報』 24, 신라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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