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의 안정을 위해 빼든 칼
권좌에 오른 이가 집권 후 측근이나 유력 인물을 제거하는 이른바 ‘숙청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합니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그에게 토사구팽 당한 한신韓信, 대표적 ‘흙수저 성공담’의 주인공이지만 대학살에 가까운 숙청을 자행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제외한 중공中共 건설 유공자 대부분을 숙청한 마오쩌둥毛澤東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우리 역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숙청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어요. 문무왕文武王(신라 제30대 왕, 재위 661~681)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문왕神文王(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에게는 통일신라의 안정적 기틀 마련이라는 임무가 있었습니다. 신문왕 역시 이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죠.
그는 즉위한 지 한 달 만에 일어난 소판蘇判(신라 17관등 중 제3등 잡찬迊湌의 이칭) 김흠돌金欽突의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이에 가담한 파진찬波珍湌(신라 17관등 중 제4등) 김흥원金興元, 대아찬大阿湌(신라 17관등 중 제5등) 진공眞功 등을 한꺼번에 제거했습니다.*1 또한 이찬伊湌(신라 17관등 중 제2등) 김군관金軍官에게 김흠돌의 반란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장남과 함께 자결하라는 명을 내렸다.*2 김군관은 고구려 정벌에 세운 공으로 문무왕 때 상대등上大等(신라 17관등을 초월한 최고 관직)에 올랐으며, 병부령兵部令(병권의 총책임자)을 겸직한 유력 진골 귀족이었어요.
신문왕 즉위 후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통일 직후 혼란을 잠재우고 왕권 전제화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정지 작업의 일환이었습니다. 12년의 재위기간 동안 그가 이룩한 기반을 토대로 통일신라의 전성기인 중대中代가 도래할 수 있었어요.
고려사에서 숙청을 얘기하자면 광종光宗(고려 제4대 왕, 재위 949~975)을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태조太祖 왕건王建(고려 제1대 왕, 재위 918~943)의 네 번째 아들이었으며, 유약했던 형 정종定宗(고려 제3대 왕, 재위 945~949)과는 달리 호탕하고 과감한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독자적 연호의 사용, 과거제 실시, 관복 제정, 노비안검법 실시 등 한국사 관련 시험의 단골 주제로 다뤄질 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론 왕권 강화를 위해 피바람을 몰고 온 피의 군주였습니다.
왕건의 호족융화책으로 인해 고려 초기 개국공신의 수는 320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고려 왕실에 있어 잠재적인 위협요소일 수밖에 없었겠죠? 광종은 재위 11년이 되던 960년, 공신 준홍俊弘과 왕동王同이 모반을 꾀한다는 참소를 계기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아마 오랜 기간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었을 거예요.『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당시 참소와 아첨이 넘쳐나 감옥이 모자랄 지경이었다고 하며, 하나뿐인 아들 주伷(고려 제5대 왕 경종景宗)마저 의심을 받아 아버지인 광종을 가까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4 경종이 즉위할 때 옛 신하 중 남아 있는 이가 40여 명뿐이었다고 하니,*5 광종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조선 태종太宗(조선 제3대 왕, 재위 1400~1418)은 고려 광종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입니다. 광종과 태종 모두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골육상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고, 왕권의 안정을 위해 공신과 친인척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여담이지만 광종과 태종 모두 앞선 왕의 묘호廟號가 정종으로 동일하며, 두 사람의 능호陵號 역시 한자 표기는 다르나 헌릉으로 같습니다(광종의 능은 헌릉憲陵, 태종의 능은 헌릉獻陵). 시쳇말로 ‘평행이론’이라 할 법합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조선 제1대 왕, 재위 1392~1398)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던 태종은 힘겹게 왕위에 오른 만큼 의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왕세제王世弟(왕위를 이을 왕의 아우)로 있을 당시 일찌감치 사병 혁파를 추진하여 신하들의 사사로운 병권 운영을 차단했고, 취임 후 6조 직계제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죠. 또한 8도 체제를 정비하여 오늘날 지방제도의 근간을 만들고, 호패법 시행·서얼차대법 제정·주자소를 통한 활자 제작 등 조선 왕조 500년의 토대는 태종 때에 이뤄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피 흘리며 권좌를 쟁취한 이들이 늘 그렇듯 태종 역시 왕권에 대한 위협을 극도로 경계했고, 이는 공신들에 대한 숙청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거이李居易를 중앙 정계에서 제거했고,*6 즉위를 도운 공신이자 외척으로 득세하던 자신의 처남 네 명을 1410년과 1416년 두 번에 걸쳐 죽음으로 내몰아 왕비 원경왕후元敬王后 민 씨의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립니다.*7 그가 이처럼 인륜을 저버리면서까지 닦아놓은 왕조의 기틀 위에서 아들 세종世宗(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의 눈부신 업적이 찬란히 만개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를 사는 이들은 지나간 과거에서 교훈을 찾고 똑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으려 역사를 공부합니다. 무서운 사실은 결국 역사는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功이 뛰어날지라도 역사는 과過 역시 결코 잊지 않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1) 『三國史記』 卷8 新羅本紀8 神文王 1年(681).
*2) 『三國史記』 卷8 新羅本紀8 神文王 1年(681).
*3)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사의 시기를 상대上代(제1대 혁거세 거서간~제28대 진덕여왕), 중대中代(제29대 태종무열왕~제36대 혜공왕), 하대下代(제37대 선덕왕~제56대 경순왕)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4) 『高麗史』 卷2, 世家2, 光宗 11년(960) 3月.
*5) 『高麗史』 卷93, 列傳6, 諸臣, 崔承老.
*6) 『太宗實錄』 卷8, 太宗 4年(1404) 10月 18日.
*7) 『太宗實錄』 卷19, 太宗 10年(1410) 3月 17日;『太宗實錄』 卷31, 太宗 16年(1416) 1月 13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