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문화유산 뒷이야기

무령왕릉과 백제금동대향로

by goeunpa

지난 2019년 3월,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가야의 건국신화를 새긴 것으로 보이는 토제방울(흙으로 만든 방울)이 발견되었습니다. 지름 5cm 정도의 방울 겉면에는 거북의 등껍질, 남성 성기(혹은 산봉우리), 관을 쓴 남자, 하늘에서 줄에 매달려 내려오는 자루, 춤추는 여자 등의 그림이 확인되며, 발굴팀은 이를 가야의 건국신화를 나타낸 것으로 파악했어요.

토제방울.png
토제방울1.png
토제방울2.png
(왼쪽부터) 고령 지산동 고분군 출토 토제방울, 토제방울 선각그림(성기, 거북, 남자), 토제방울 선각그림(여자, 사람, 줄에 매달린 자루)

3월 토제방울 발굴에 이어 4월에는 고려 초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약사불좌상이 경남 고성의 거류산 정상 인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한 개인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을 통해 마애불의 존재를 인지한 뒤, 거류산 일대를 두 차례에 걸쳐 조사한 끝에 확인한 것이었죠.

noname01.png 경남 고성 거류산에서 발견한 마애약사불좌상 (자료: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은 세월 속에 묻혀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위에서 언급한 ‘가야 토제방울’처럼 정식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되거나 고성 거류산 마애약사불처럼 우연히 그 존재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1500년 전 백제의 모습이 확인되다

한국 발굴사상 최고이자 최악의 발굴조사로 평가받는 무령왕릉은 삼국 시대의 왕릉으로 전하는 고분 중 그 주인이 밝혀진 유일한 무덤입니다. 또한 백제 왕릉 중 유일하게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무덤이라는 점에서 무령왕릉의 존재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 할 수 있어요.*1


무령왕릉은 일제강점기에 송산리 고분군의 조사 과정에서 제6호 고분에 딸린 무덤 정도로만 인식되어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2 우연한 계기로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71년 7월 5일, 6호 고분으로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인부의 삽자루 끝에 무언가 닿았고 그것이 무령왕릉의 벽돌이었던 것이죠.

공주_송산리_고분군_전경(2020년)(자료출처___국립문화재연구소).jpg
공주_송산리_고분군_무령왕릉_고분_입구_(촬영년도___2015년).jpg
무령왕릉내부.jpg
(왼쪽부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경, 무령왕릉 입구, 무령왕릉 내부 (자료: 국가유산청)

긴급조사단이 꾸려진 가운데 벽돌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던 벽돌을 치워내자 무덤 통로에 주인을 알려주는 지석誌石*3과 석수石獸가 조사단을 맞이했고, 이어 무덤 안에서 46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석에는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이라는 피장자의 정보가 명확히 실려 있어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사마'는 바로 백제 제25대 왕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의 이름이었거든요.


한 번도 도굴된 적 없는 백제 왕릉이, 그것도 주인이 확실한 왕릉이 발굴됐다는 특종이 나가자 무령왕릉에는 취재진과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고분을 공개하라는 취재진의 등쌀에 조사단보다 취재진에 의해 왕릉 내부가 먼저 공개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이어졌습니다. 결국 아수라장 같은 현장 속에서 유물들은 훼손되었고, 17시간 만에 모든 유물을 졸속으로 수습해 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김원룡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생전에 "무령왕릉 발굴은 내 삶의 가장 큰 수치이자 과오"라고 말했습니다.

국보_무령왕릉_지석(2014년_국보_동산_앱사진).jpg
국보_무령왕릉_석수2_문화재대관(국보).jpg
무령왕비_금제관식.jpg
(왼쪽부터)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릉 석수, 무령왕비 금제 관식 (자료: 국가유산청)

그 발굴 과정은 비록 고고학계의 흑역사로 남게 되었지만, 무령왕릉 발굴은 백제 사회의 국제성, 백제의 묘제 변화 등 베일에 가려져 있던 백제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졸속 발굴의 기억’은 이후 경주 황남대총·천마총 발굴에 큰 교훈으로 작용했습니다.


백제 문화의 정수

국보 제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충남 부여의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사적 제434호)에서 발견된 것으로, 백제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물로 손꼽힙니다. 대향로가 발견된 곳은 당시 이름 없는 절터(‘능산리사지’로 명명되기 전) 인근으로 본래 능산리 고분군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이 들어설 곳이었어요.


본격적인 공사 전 유물·유구 등의 확인을 위해 진행된 사전시굴조사의 별다른 진척이 없던 1993년 12월 12일, 물구덩이에서 뚜껑 같은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발굴단은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끼며, 도굴 등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전등을 밝힌 채 야간작업을 진행하여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향로를 수습하였죠.

noname01.png 백제금동대향로의 출토 당시 모습 (자료: 국립부여박물관)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대향로는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래부터 용 모양의 받침, 연꽃으로 표현된 몸체, 산봉우리와 갖가지 동식물·신선 등 160여 개의 형상이 정교하게 조각된 뚜껑, 마지막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뚜껑 위의 봉황까지 그 화려함과 정교함은 가히 백제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었습니다. 자칫 땅 밑에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던 백제금동대향로는 현재 국외 반출 불가 유물로 지정되어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어요.

붙임 2. 국보 백제금동대향로.JPG_.JPG 백제금동대향로 (자료: 국립부여박물관)


우리는 흔히 문화유산 중 사적·명승·천연기념물 등이 보물·국보로 지정된 것들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며, 보물보다는 국보가 더 중요한 것이라 쉽게 이해합니다. 의미 없는 과거의 유산이 어디 있겠어요. 1등만이 우선시 되는 현대 사회에서 문화유산의 보편적 가치가 퇴색되어선 안 되겠습니다.




*1) 신라의 대표적 무덤 양식인 돌무지 덧널무덤의 경우 나무로 만든 방 안에 관을 넣고 그 위에 돌을 쌓고 다시 흙으로 덮어 만든 것으로, 도굴이 쉽지 않아 부장품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주요 무덤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의 경우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과 통로가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관을 안치한 방 위에 그대로 흙을 덮은 형태로 도굴에 취약하였다.

*2) 현재 무령왕릉은 제7호분으로 분류되어 있다.

*3)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



keyword
이전 11화잊혀서는 안 되는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