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 114주기
메인사진: 뤼순감옥 수감 당시 간수과장 기요타淸田에게 써준 글씨. 오른쪽 위에 '증청전선생贈淸田先生'이라 썼다. (자료 국가유산청)
2024년은 안중근安重根 의사(1879~1910)가 순국한 지 114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제거한 그의 의거는 당대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칭송할 만큼 국제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었어요. 재산이 수천 석에 달할 정도로 넉넉한 향반 가문의 자제였던 그가, 항일 투쟁에 뛰어들어 일본 총독을 제거하기까지의 행적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안중근은 고려 말 성리학을 들여온 대유학자 안향安珦(1243~1306)의 후예입니다. 그의 집안은 황해도 해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전형적인 향반이었어요. 부친 안태훈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 칭호를 받은 유림이었으나, 외세를 배격하던 보수적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박영효 등이 주도하던 일본 유학생 선발에 뽑히는 등 개화를 통한 개혁에 뜻을 두었으나, 김옥균·박영효 등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꿈을 접어야 했죠.
‘개화에 눈을 뜬 유학자’ 안태훈安泰勳의 아들로 태어난 안중근은 유학을 통한 민족의식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개화의식을 동시에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를 천주교에 입교시킨 것도 부친이었죠. 아버지의 인도로 천주교도가 된 안중근은 프랑스인 빌렘(J.Wilhelem)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Thomas라는 세례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도마 안중근’의 도마는 그의 세례명 토마스를 음차 한 것이에요.
안중근이 처음부터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어요. 그는 천주교 포교 활동을 통해 일반 민중의 삶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민중 계몽과 실력 양성의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고, 실제로 1906년 석탄상회 경영과 삼흥학교·돈의학교 설립 등 산업과 교육 분야의 진흥을 위해 매진했습니다. 또한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남에 따라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죠.
그러나 안중근을 비롯 수많은 이의 피땀 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명운은 어두워져만 갔습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한 고종高宗(조선 제26대 왕, 재위 1863~1907)의 강제 퇴위에 이어 사실상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킨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 체결 등 일련의 사건은, 안중근으로 하여금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직접적인 무장독립투쟁의 길이 더 시급함을 깨닫게 한 것으로 보여요.
안중근은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자 국외 독립전쟁의 전개를 위해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부대를 조직, 1909년까지 무장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5,000여 명의 일본군과 맞선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크게 패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재기를 꿈꾸던 중 1909년 2월, 뜻을 같이 하는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결성하게 됩니다. 12명의 동지는 왼손 약지를 잘라 피로써 대한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했으며, 안중근은 이때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제거를 다짐했죠.
마침내 1909년 9월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은 동지들과 만반의 준비를 한 뒤 10월 21일 하얼빈으로 출발했습니다. 10월 26일 미리 하얼빈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은 러시아 재무대신과 회견을 마치고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한 후 군중 쪽으로 향하던 이토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토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그는 이토로 보이는 이에게 4발을 쏘았고, 그가 이토가 아닐 것에 대비하여 곁에 있던 3명의 일본인에게 3발을 더 쏘았어요. 이후 체포될 때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대한민국 만세(코레아 우라)’를 외쳤다고 전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급히 옮겨져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이내 절명했습니다. 안중근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 구금되었다가 곧 뤼순旅順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옮겨졌고 이곳에서 여섯 번에 걸친 형식적인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는 이토 사살 직후부터 사형을 언도받기까지 단 한 번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당당하고 의연했으며, 수감 중에는 자신의 자서전인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 저술에 매진했어요.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의 간수를 맡았던 일본인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안중근의 성품에 감복하여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교수형을 당하기 전 안중근이 자신에게 써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여덟 글자를 죽을 때까지 간직하며 그를 기렸습니다. 안중근의 인간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죠.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안중근은 뤼순감옥의 공공묘지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직까지도 그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요. 정부와 민간단체가 유해 발굴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매장 위치조차 특정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복잡한 국제 관계 속에서 이마저도 쉽지 않아 서거 114년이 지나 지금까지 영웅의 유해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영웅은 어디에 잠들어 있을까요. 조속히 돌아와 효창공원에 마련된 그의 자리에서 편안한 내세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