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풍운아
메인사진: 서울 운현궁 이로당 전경. 서울 종로에 있는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 즉위하기 전까지 자란 곳이기도 합니다. (자료 국가유산청)
“왕실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파행으로 치닫던 나라를 바로잡고자 한 개혁가”
“무리한 경제정책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해 나라를 퇴보시킨 장본인”
위 인물평은 모두 조선 후기 풍운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에 대한 것입니다. ‘대원군大院君’이란 왕이 후사 없이 죽어 왕의 종친 중 새로운 왕을 옹립하였을 경우 새로운 왕의 생부生父를 일컫는 말이에요. 조선 왕조에서 대원군은 모두 네 명이었으나,*1 그중 아들이 왕이 되었을 때 살아 있었던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합니다. 그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高宗(조선 제26대 왕·대한제국 제1대 황제, 재위 1863~1907)을 대신해 전권을 휘두른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죠.
정조正祖(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 사후 조선의 19세기는 특정 가문(국왕의 외척 세력)에 의해 국정이 좌우되는 파행적 정치형태로 얼룩졌습니다(세도정치기勢道政治期). 흥선대원군 역시 세도정치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세도정치의 핵이었던 안동 김 씨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허수아비 왕을 원했으며, 자연스럽게 왕위 계승과 관련된 왕족들을 견제했습니다.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빅픽처’를 그리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 씨들의 눈을 피해 파락호 행세를 하는 한편 왕실 최고 어른인 조대비趙大妃*2에게 접근했습니다. 후사가 없던 철종哲宗(제25대 왕, 재위 1849~1863)이 그대로 승하할 경우, 차기 왕의 지명권을 그녀가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조대비는 그녀 자신 역시 한때 안동 김 씨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명문가 풍양 조 씨의 사람이었지만, 철종 즉위 후 안동 김 씨의 세도하에서 속 편히 기지개를 켤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원군과 손을 잡음으로써 새로운 정치 세력의 결집을 통해 집권을 추구한 것으로 보여요.*3 결국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明福을 왕위계승자로 지명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친아버지라는 프리미엄까지 더해져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죠.
흥선대원군은 집권 후 안동 김 씨를 정계에서 대거 몰아내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일부 안동 김 씨와는 손을 잡아 실익을 챙기는 뛰어난 정략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당시 각종 특권을 누리며 폐단이 극심했던 서원書院을 전국 670여 개소 중 47개소 만을 남기고 모두 철폐시켰습니다. 서원철폐는 대원군이 시행한 개혁 중 가장 결단력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실제로 국가재정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어요.*4 그러나 전국의 서원철폐는 곧 대부분의 유림이 대원군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들어, 그의 개혁정책이 지지기반을 잃게 되는 한계성을 지닌 것이기도 했습니다.*5
왕권의 재정립, 세도정치 근절, 국가 재정의 회복, 군제 개혁 등 조선을 위해 큰 공을 세운 그였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은 두 가지 뼈아픈 실책 때문이에요. 임진왜란 후 폐허로 남아있던 경복궁을 재건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조선의 정궁 경복궁이 제 모습을 찾게 되었지만, 재원확보를 위해 시행한 당백전 발행과 원납전 징수는 백성의 삶이 다시 피폐해지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새로운 사상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이 우려되자 천주교에 대한 대박해를 감행하고, 나아가 강력한 통상수교거부정책(쇄국정책)을 펼친 것은 훗날 조선 근대화의 진로를 차단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1873년, 왕보다 더 큰 권력을 손에 쥐었던 그에게도 끝은 오고 말았습니다. 22살의 나이로 친정親政을 할 나이가 지났음에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큰 불만을 갖고 있던 고종이 때마침 올라온 최익현의 대원군 비판 상소를 적극 지지하며 친정을 선언했고, 결국 대원군은 원치 않은 정계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호시탐탐 재집권을 노렸지만,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갈등은 매번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철저히 막고자 했지만, 그의 은퇴 이후 정국은 완전히 왕비의 친정인 민 씨 집안이 쥐락펴락하고 있었어요. 명성황후 사후에도 고종과의 사이는 끝내 회복되지 않았고, 결국 죽는 순간에도 고종을 보지 못한 채 1898년 2월 22일 78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비운의 개혁가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126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며느리 명성황후와 더불어 한국사에서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가 전 세계적 격변기였던 19세기가 아닌 그보다 좀 더 이른 시기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오로지 조선의 내치에만 신경 쓸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게 되는 것은 그만큼 그가 남긴 정치적 족적이 선명하기 때문이겠죠.
*1) 선조宣祖의 아버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 인조仁祖의 아버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이부李琈(후에 원종元宗으로 추존), 철종哲宗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㼅,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2)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 추존왕인 익종翼宗(아들인 제24대 헌종이 즉위한 뒤 왕으로 추존됨)의 비妃로, 아들 헌종이 즉위하여 왕대비王大妃가 되었다. 철종 8년(1857)에 대왕대비大王大妃로 진봉되었다.
*3) 李玟洙, 2002,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그 한계성」 『東學硏究』 11, 한국동학학회, 6쪽.
*4) 김혜승, 2012, 「대원군의 국가경영-19세기 중엽 세계화 도전과 대응의 정책화」 『韓國政治外交史論叢』 34, 한국정치외교사학회, 18쪽.
*5) 李玟洙, 2002, 앞의 논문, 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