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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大水

물난리

by goeunpa

장마가 지나고 폭염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매년 여름이면 수해 뉴스를 접하게 되죠. 예로부터 자연재해는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하늘의 뜻으로 간주됐습니다. 『사기史記』º1에 보면 중국 고대 전설상의 왕조 ‘하夏’를 세운 우禹가 요순시대堯舜時代º2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데에는 황하를 효과적으로 컨트롤하여 백성을 수해로부터 보호한 업적이 결정적이었음을 전하고 있어요.º3 고래로부터 자연재해, 특히 물난리를 다스려 백성의 안녕을 도모하는 것은 군주가 갖춰야할 필수요소였습니다.


전근대 사회에서 자연재해는 군주의 책임이었으며, 자연재해의 발생은 군주의 실정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연유로 홍수, 지진, 기근 등을 전하는 기록에는 어지러운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국가적으로 백성을 진휼하고, 사면령 등을 행했던 기록이 뒤따릅니다. 우리나라 역시 일찍부터 ‘대수大水’라고 표현된 물난리(홍수) 기록과 나라의 구제책 등을 확인할 수 있어요.


신라의 파사婆娑 이사금尼師今(신라 제5대 왕, 재위 80~112)은 많은 비가 내려 백성들이 굶주리자 그들을 위무하기 위해 사자使者를 10길로 나누어 보내면서 나라의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고,º4 지마祗摩 이사금(신라 제6대 왕, 재위 112~134)은 홍수가 나자 사형죄를 제외한 나머지 죄인들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º5 나해奈解 이사금(신라 제10대 왕, 재위 196~230)은 나라의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나자 수해를 입은 지역의 1년 치 세금과 공물을 면제해 주었고,º6 헌덕왕憲德王(신라 제41대 왕, 재위 809~826) 때 대홍수로 또다시 서쪽 지방이 큰 피해를 입자 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피해 지역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1년 치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는 기록이 전합니다.º7


고구려의 경우 민중왕閔中王(고구려 제4대 왕, 재위 44~48) 때 동쪽 지방의 백성들이 홍수로 인해 굶주리자 왕이 나라의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고 해요.º8 기록의 부재로 고구려·백제·신라 역대 왕들의 진휼 사실을 모두 확인할 수는 없지만, 1900여 년 전 중앙에서 사자를 파견해 백성을 위로하는 모습이 오늘날 고위급 간부들이 재난지역을 방문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고려시대로 오면 이전과 비교해 비교적 구체적인 구제 이유와 구제책에 대한 내용을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1012년 현종顯宗(고려 제8대 왕, 재위 1010~1031)이 재해로 인한 곡식 가격의 급등으로 백성들이 곤란해 할 것을 걱정하며 진휼을 명하는 모습이 보이고,º9 정종靖宗(고려 제10대 왕, 재위 1034~1046) 때는 동북로東北路(지금의 강원도와 함경도 일부)의 여러 주州에서 홍수로 인해 백성들이 궁핍해지자, 왕이 명을 내려 쌀과 소금을 내어 진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의창義倉º10을 열어 백성을 돕거나, 음식을 준비하여 백성에게 베푸는 등의 구휼 기록이 다수 보여요.


조선으로 오면 국가적 차원에서 물난리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근본적 대책을 강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수도 한양의 인공하천 개설과 수표교水標橋입니다. 당시 한양은 하수처리시설의 미비로 많은 비가 내릴 때마다 하천이 범람하여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이에 태종太宗(조선 제3대 왕, 재위 1400~1418) 때 개천(지금의 청계천)의 준설작업이 시작됐고,º11 사업을 이어받은 세종世宗(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은 청계천 위에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교를 세워 홍수에 대비토록 했습니다.º12

조선 전기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를 올리던 사직단社稷壇.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기도 합니다. (자료 국가유산청)

세월이 흘러 영조英祖(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1776) 때에 이르자 급증한 한양 인구로 인해 하천의 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설상가상 증가한 인구만큼 땔감을 위한 벌채가 과도하게 이뤄져 토사가 그대로 청계천으로 밀려들었고, 홍수피해가 빈번하게 되었죠. 이에 영조는 1752년 직접 궐 밖으로 나가 여론을 수렴하고,º13 8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대대적인 준설작업을 진행했습니다.º14 수표교 다리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 글자를 세로로 새겨 물높이를 측정할 때 활용하도록 했죠.

수표교에 새겨져 있는 경진지평庚辰地坪 (자료 국가유산청)

예나 지금이나 자연재해는 하늘의 소관입니다.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들을 어루만져줄 지도자를 원하는 백성의 마음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영조의 애민정신에 기반을 둔 정확한 정책 수립과 판단, 이를 확실히 이행하는 모습 등을 보노라면, 21세기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몇 백 년 전 영조에게 배워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느끼게 합니다.




º1 『사기』는 중국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기원전 108~기원전 91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이다. 후대 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이후 중국의 역대 정사正史가 모두 이 체제를 따랐다.

º2 요堯와 순舜은 중국 역사의 시작으로 통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오제’에 속하며,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성군으로 불린다. 이들의 치세를 합쳐서 ‘요순시대’라고 하며, 역사상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쓰였다. ‘우’는 순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물려받아 하왕조를 건국하였다.

º3 『史記』 卷2, 夏本紀.

º4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1, 婆娑尼師今 29年(108).

º5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1, 祗摩尼師今 3年(114).

º6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1, 奈解尼師今 3年(198).

º7 『三國史記』 卷10, 新羅本紀10, 憲徳王 6年(814).

º8 『三國史記』 卷14, 高句麗本紀2, 閔中王 2年(45).

º9 『高麗史』 卷80, 志34, 食貨3, 軫恤.

º10 고려와 조선 초기에 존재했던 대표적인 구휼 기관.

º11 『太宗實錄』 卷22, 太宗 11年(1411).

º12 『世宗實錄』 卷93, 世宗 23年(1441).


※ main photo by purpleivy_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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