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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민족상잔의 비극

by goeunpa

2020년은 6·25 전쟁 70주년이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6·25 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하여 '기억, 함께, 평화'의 3대 주제 아래 국내외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어요. 최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우리나라는 6·25 전쟁 22개 유엔참전국의 참전용사(평균 88세)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100만 장의 마스크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분들이죠.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 35년의 폭압에서 드디어 벗어났습니다. 새 시대에 대한 희망에 한껏 부풀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한국인들의 눈에 나타난 것은 미국과 소련의 부대가 한반도로 진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미·러는 한반도에 진주해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통치하는 군정軍政을 실시했습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극명히 갈린 한반도에는 결국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말았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남쪽의 대한민국 정부, 1948년 9월 9일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출범했습니다. 그 결과 군정을 위한 임시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졸지에 국경선이 되어버렸어요.


img.jpg Photo by Антон Дмитриев_Unsplash

북한은 정권 수립 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49년 3월 소련과 조소군사비밀협정, 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연이어 채결했어요.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김일성은 무력적화통일을 구상하기에 이르렀죠. 당시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할 수 없이 열악했습니다. 당시 북한의 육군 병력만 해도 남한의 두 배였고, 남한이 보유한 각종 군사장비 역시 북한보다 현저히 적었죠. 1949년 주한미군사고문단이 한국 육군은 애국심 하나만 빼면 1775년 독립전쟁 당시의 미군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열악했던 걸까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기습적으로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강행했습니다. 그날 오전 개성방어선이 무너진 뒤 개전 3일 만인 6월 28일 새벽, 서울이 북한군 손에 들어가고 말아요. 미국은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 북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며 전투행위의 즉각 중지를 요청했습니다. 북한이 미국의 말을 들었을까요? 그랬다면 끔찍한 결과가 조금은 덜해졌겠지만,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묵살한 채 전쟁을 계속했고, 결국 6월 27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미 해군·공군의 한국군 지원을 명령했습니다.


7월 7일에는 미국의 맥아더 총사령관이 지휘하는 유엔군 파견이 결정되어 전세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어요. 8월 초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린 한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결사 항전을 벌여 방어에 성공했고, 9월 15일에는 세계전쟁사에 길이 남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죠. 이아 9월 28일 서울 탈환, 10월 1일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10월 19일 평양 점령, 10월 24일에는 평안북도 청천강변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가게 됐습니다.


img.jpg 6·25 전쟁 중 유엔군에 포로로 잡힌 공산군을 수용하던 거제포로수용소의 현재 모습 (자료 국가유산청)

통일까지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은 중공군 28만 명의 참전으로 다시 앞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 전세는 양측의 피해만 키우며 장기화됐어요. 결국 1951년 7월 10일 미국과 소련 간에 정전회담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회담과는 별개로 회담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투는 계속되었고 엄청난 비용과 인명 손실을 피할 수 없었죠. 이윽고 전쟁 발발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양측 모두 얻은 것 없이 허망하게 정전협정이 체결됐어요.


전쟁의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한반도의 80%가 초토화됐고, 전쟁에 동원된 한국군·북한군·유엔군·중공군 사상자 수는 도합 97만 3천여 명에 이르렀죠. 민간인의 경우 당시 남북한 인구의 1/5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세계최강대국 미국이 그 지위를 굳혔고, 서방동맹의 강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분열, 미·소로 대표되는 양 진영의 냉전 격화, 핵무기 대결의 시대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국제전이었던 만큼 6·25 전쟁은 국제정세에도 매우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습니다.º


북한은 여전히 6·25 전쟁을 '북침'이라 주장하며 전쟁 발발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현재 지구촌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습니다. 전쟁 후 70년이 훌쩍 지난 지금, 6·25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들이 남북한 사회 모두에서 중추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한반도에 현실적인 '순풍'이 하루라도 빨리 불기를 기대해 봅니다.




º 김학준, 1989, 『한국전쟁』, 박영사, 342~375쪽; 정영순, 2012, 「임진왜란과 6·25 전쟁의 비교사적 검토」 『사회과교육』 51-4, 한국사회과학교육연구학회, 7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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