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이 품은 이야기
송광사松廣寺는 전라남도 순천 조계산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불교계 최대 종단 조계종曹溪宗의 근본 도량이죠. 그 반대편 조계산 동쪽에 조계종 다음으로 교세가 큰 태고종太古宗의 본산지 선암사仙巖寺가 있습니다.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선암사는 그 위세만큼 다양한 중요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어요. 그중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무지개다리, 승선교昇仙橋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아치형의 다리는 그 아래로 흐르는 하천에 비치는 모습과 어우러져 하나의 원을 이루며 아름다움이 배가 됩니다. 물에 비친 다리의 아랫부분을 가만히 보면 용의 머리, 즉 용두龍頭가 거꾸로 달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는 다리를 지나는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 모습을 확인하려면 다리 밑 물가로 내려가야만 하죠. 이처럼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다리 밑에 용두를 조각한 이유는 행여나 물을 통해 사기邪氣가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에서 기인합니다.
선암사 승선교의 용두와 비슷한 것이 송광사에도 있습니다. 법당 영역으로 진입하기 전에 건너야 하는 삼청교三淸橋 밑에 용의 머리가 사악한 기운으로부터 불법佛法을 지키기 위해 자리하고 있어요. 이처럼 선암사 승선교나 송광사 삼청교와 같이 국내의 여러 문화유산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한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쉬운 숨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강화도의 정족산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하는 삼랑성三郎城(정족산성)º이 있어요. 그 한가운데 위치한 전등사傳燈寺의 대웅전은 그 역사적 가치만으로도 명성이 높지만, 처마 밑의 재미난 조각상으로도 유명합니다. 대웅전 처마를 올려다보면 네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벌거벗은 여자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을 찾을 수 있는데, 이 조각상에는 절을 짓던 목수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요.
나부상의 주인공은 절을 짓던 목수를 배신하고 재물을 취하여 달아난 여인이라고 전합니다. 목수가 여인을 벌하기 위해 그 형상을 조각해 놓은 것이라는 전설이죠.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개의 조각상 중 두 개는 양손이 아닌 한 손으로(한 개는 왼손, 한 개는 오른손)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것이에요. 벌을 받는 와중에도 꾀를 부리는 모습을 남김으로써 자신을 배신한 여인의 약삭빠름을 표현하려 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떠나간 여인에 대한 미련 때문에 벌을 받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 한쪽 팔이라도 쉬게 해 주려는 목수의 배려였을까요. 목수는 자신의 마음을 감상하는 이의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 왕조의 궁궐 중 형태와 담장 내 권역의 분위기가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공간이 있어요. 바로 종로3가역에 위치한 종묘宗廟ºº입니다. 종묘는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과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에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는 조선 왕가의 사당이에요.ººº
저는 개인적으로 종묘만이 갖는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시끌시끌한 서울 도심 한복판을 지나 종묘로 들어가 정전의 영역 안에 들어서면, 주변의 소음은 어느새 사라져 있고 공기마저 차분히 가라앉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계절마다 풍기는 분위기도 매번 다르죠. 내가 서울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인지, 이곳이 자연 속에 위치한 공간인지 헷갈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로 태조太祖(조선 제1대 왕, 재위 1392~1398) 때인 1395년에 7칸으로 지어졌습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光海君(조선 제15대 왕, 재위 1608~1623) 때 11칸으로 중건되었으며, 이후 모셔야 하는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몇 번의 증축을 거쳐 현재의 19칸이 되었습니다.
건물의 외형 변화 외에도 증축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정전 월대月臺(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의 중앙 계단은 건물이 길어질 때마다 함께 그 위치가 이동했습니다. 이전 자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게 되었죠. 손으로 쓸어보면 파인 부분이 느껴져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붕을 올려다보면 익공翼工(목조 건물의 지붕을 받치는 공포栱包의 일종)의 모양도 원래 있던 것과 나중에 생긴 것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요. 머리(기록)가 아니라 몸(현장)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부인 셈입니다.
단지 유명한 문화유산이라는 이유로 한 번씩 들러 겉만 훑고 오는 것은 명승지에 들러 경치 감상을 하고 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숨은 이야기를 찾아 그 의미를 곱씹어보는 재미를 발견한다면 문화유산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질 거라 확신해요. 많은 분들이 그 재미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º 정족산성은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전보를 올린 곳입니다. 성 안에 강화군민들이 양헌수 장군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873에 세운 승전비가 있습니다.
ºº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ººº 정전에는 태조(1대),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추존(사후에 왕으로 모셔짐)],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과 비妃를 합쳐 총 49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며,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목조·익조·도조·환조)와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예종(8대), 인종(12대), 명종(13대), 원종(추존), 경종(20대), 진종(추존), 장조(추존), 영왕과 각 왕의 비를 합쳐 모두 34위가 모셔져 있어요.
모두가 한국사 전문가일 필요는 없어요.
한국사 소소한 상식을 요만큼씩만 알아도,
그걸로 충분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