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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元敬王后

남편을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 조선 최고의 성군을 낳은 어머니

by goeunpa Feb 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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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임금 태종太宗(이방원, 재위 1400-1418)은 너무나 유명하죠? 불세출의 영웅 이성계李成桂(조선 제1대 왕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도와 새로운 나라 '조선'을 건국하였고, 형제들과 싸워 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 그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은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었습니다.

조선도자 태종 태항아리. 일제 강점기 때의 사진입니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조선도자 태종 태항아리. 일제 강점기 때의 사진입니다. (자료: 국립중앙박물관)

태종은 총 19명의 자녀를 두었어요. 아들이 12명, 딸이 7명이었죠. 그중 정비인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1365-1420) 사이에서 아들 넷과 딸 넷이 태어났습니다. 요절한 자식은 제외한 숫자입니다. 태종 즉위 후 벌어졌던 피바람과는 별개로 부부 사이는 상당히 금실이 좋았던 것으로 여겨지는 대목이네요.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 조선 최대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世宗(조선 제4대 왕, 재위 1418-1450)입니다.

덕수궁에 있던 세종대왕 동상. 지금은 청량리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덕수궁에 있던 세종대왕 동상. 지금은 청량리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야말로 조선 역사상 큰 족적을 남긴 여러 왕비 중 '철의 여인'으로 첫 손에 꼽힐 만한 인물입니다. 그만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죠. 한 번 살펴볼까요?


그녀는 1365년(공민왕 14년), 고려 최고의 명문가 여흥 민씨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방원보다 두 살 위였어요. 두 사람은 1382년(우왕 8년) 이방원이 16살, 민씨가 18살일 때 혼인했습니다. 결혼할 때만 해도 두 사람의 신분은 민씨 쪽이 더 높았다고 할 수 있어요. 고려 말 여흥 민씨는 고려의 재상지종宰相之宗(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 중 하나일 정도로 명문가였던 반면, 이방원은 변방 무사 집안의 아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방원의 아버지 이성계가 누굽니까? 당시 외적의 끊임없는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 중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영웅이었죠. 당연히 신흥 세력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들 이방원의 자질 역시 범상치 않았습니다. 민씨의 아버지 민제閔霽는 이방원의 훗날을 내다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먼 미래에 집안에 피바람이 부는 것까진 예상 못했겠지요..)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황산대첩비입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파괴한 것을 1957년 원래의 귀부와 이수를 그대로 살려 다시 세운 것이에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운 황산대첩비입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파괴한 것을 1957년 원래의 귀부와 이수를 그대로 살려 다시 세운 것이에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방원이 왕좌에 앉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내 민씨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도전 등이 사병 혁파를 시도할 때 무기를 숨겨 놓아 훗날을 도모한 것이 민씨였어요. 민씨의 생각은 여지없이 적중했고, 그 무기들은 거사가 발생하던 날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결국 정종定宗(조선 제2대 왕, 재위 1398-1400)이 동생 이방원을 세자(명목상 형의 양자가 된 것입니다)로 책봉하자 민씨도 세자빈이 되었고, 1400년 태종의 즉위와 함께 마침내 조선의 국모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조선의 여자 중 더 오를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간 이 순간부터 '인생의 아이러니'를 정통으로 맞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애초에 원경왕후는 '간택'의 과정을 거쳐서 왕비 자리에 앉은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갖는 무게감은 후대 왕비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을 거예요. 원경왕후는 태종의 여색으로 인해 그와 다투지 않는 날이 드물 정도였고, 급기야 태종은 폐비를 언급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이는 실제로는 정치적 차원에서의 제스처였다고 보는 해석도 있으나, 둘의 갈등이 심각했음은 확실해 보이죠.


재밌는 것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무려 8명이나 된다는 점입니다. 조선의 건국 과정과 왕위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세월을 함께 견뎌낸 두 사람이었기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원망이 공존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여요. 그러한 모습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원경」에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왕권 강화를 논할 때 태종의 숙청 작업은 결코 빠지지 않는 주제입니다. 그는 자신의 즉위를 위해 물심양면 지원한 처가 민씨 집안을 거의 풍비박산 내버렸죠. 태종은 왕권의 공고화를 위해 외척의 발호를 철저히 차단하려 했고, 그 결과가 자신의 처남들인 민무구와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를 모두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한 남편의 무자비함에 죽어 나간 남동생들을 바라보는 원경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 뒤로도 원경왕후의 아픔은 계속되었습니다.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되는가 하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 애지중지 귀여워했던 늦둥이 성녕대군이 홍역으로 14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것까지 하릴없이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위안을 찾는다면 셋째인 세종이 한국 역사상 길이 기억되는 명군으로 남았다는 것이겠네요.

서울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헌릉 정면 (자료: 국가유산포털)서울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헌릉 정면 (자료: 국가유산포털)

원경왕후는 세종이 즉위한 지 2년 후인 1420년 5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태종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422년 원경왕후의 뒤를 따라갔어요. 고려의 여인으로 태어나 남편이 조선의 왕위에 오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걸크러쉬 여인,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권력의 칼바람 앞에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말았던 원경왕후. 그녀가 없었다면 태종 이방원의 인생도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 많이 달랐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요. 원경왕후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요? 문득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그녀의 이름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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