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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19. 2024

여기, 그 곳

바람의 기를 느끼다

나들잇길, 우연히 눈에 띈 팻말의 그곳. 길을 나설 때 정한 목적지만 돌아보고 오려 했지만, 자꾸만 그곳으로 발길이 쏠린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간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고 그만큼의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평평한 곳에 다다르니 산으로 병풍을 두른 고즈넉한 사찰, 운람사가 맞이한다.

운람사(雲嵐寺)는 경북 의성의 천등산 산정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신문왕 때에 의상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운람사 창건 이후의 자세한 변천 과정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보광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불복(佛腹)에서 나온 복장 유물에 따르면 조선 선조 35년과 숙종 30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보광전은 조선 후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전각이다. 운람사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복장 일괄 유물 29종 167점이 있다.

운람사가 위치한 지형은 구름 가운데 반달이 솟은 형상이다. 산 아래의 아지랑이가 구름으로 피어오른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운람사라 하였단다. 수많은 앞산의 연봉을 둘러싸고 새벽부터 연출되는 구름바다의 다채로운 변화가 장관이란다. 그 광경을 꼭 한번 봤으면 싶다. 

보광전 뒤편으로 올라가면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 앞 좌측에 서넛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가 놓인 것이 의외다. 나보다 먼저 온 불자인가 보다. 의자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는 모습이 평온해 보인다. 불당 안으로 들어가 참배하고 나오니 그가 자리를 비켜준다. 살짝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살며시 그 자리에 앉는다. 따스한 햇볕이 바람과 섞여 와 안긴다.

확 트인 시야로 들어온 하늘이 유난히 넓고 높다. 하늘 아래에선 제 모양을 내는 산들이 아기자기 속살댄다. 하늘과 산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름은 분방하게 움직인다. 분방한 구름의 형상 속에 아기 동자도 보이고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도 보인다. 마음이 녹녹하게 스며든다. 노란 햇살이 하얀 구름 위로 빛을 내린다. 빛을 받은 구름이 내 머리 위를 떠다닌다. 구름을 이고 앉은 자리가 폭신하다.

저 멀리서 바람의 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워지는 바람 소리에 음이 실린다. 댕 댕그랑, 풍경소리가 바람과 어우러져 귓바퀴를 돈다. 파노라마처럼 타고 흐르는 풍경소리에 머릿속을 굴러다니던 잡다한 기억들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어느새 몸과 마음이 말랑해지면서 구름 위에 앉은 듯 가뿐하다. 여기에 의자를 둔 이유를 알겠다. 이곳에 앉은 시간만큼은 안식의 시간이기를 바라는 깊은 뜻이 담겼음이다.

바람이 들려주는 소리, 어떤 음악가가 이보다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 수 있을까.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마음 깊숙이 차올랐던 탐욕도 내 것이 아닌 양 내려앉는다. 하늘과 산과 햇살과 구름의 조화를 뛰어넘은 소리, 댕그랑·댕 댕 댕 댕. 동글동글한 풍경소리의 파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사의 고요를 끌어안는다. 이보다 더 평온할 수 없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나 또한 그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삼성각 오르내리는 계단 옆 바위 틈새에 핀 제비꽃 몇 송이. 오를 때 느꼈던 측은지심은 사라지고 아늑하고 온화하게 다가온다. 바위가 버팀목으로 감싸고 있으니 맘껏 앙증맞은 매력을 뽐낼 수 있으려니 싶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잠시의 시간이나마 마음을 비우고 돌아본 시간이 값지다.

바람을 따라 걷는다. 따라온 풍경소리와 경내를 함께 거닌다. 천삼백여 년의 세월을 지켜낸 고찰의 풍경이 아늑하다. 보광전 앞 삼층석탑을 돌아 출입구 쪽으로 나간다. 사찰에선 보기 드물게 입구에 장독대가 그득하다. 정갈하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독에서 이곳의 인심을 읽는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이들의 허기를 채워주고도 남음이다. 마음과 육신의 허기가 채워지면 더는 바랄 게 무엇이려나.

가끔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움을 느낄 때가 있다. 다 내려놓고 싶은 그런 날, 이곳을 찾아 바람의 기를 받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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