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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19. 2024

여기, 그 곳

구월에 피는 천상의 꽃

산등성이가 온통 하얗다. 때아닌 눈이라도 내린 건가. 주변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점차 눈앞으로 펼쳐지는 하얀 길. 은은하게 향기가 스며온다. 이 향기의 주인공은 누구런가. 고요히 불어오는 바람에 친근히 답하는 하얀 꽃이렷다. 

가을,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여기저기에 축제 마당이 펼쳐진다. 이곳 공주 구룡사에도 축제가 한창이다. 국화과에 속하는 구절초가 구절산 구룡사 절 주변을 빼곡히 에워싸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설산이다. 가까이서 보니 하얀 꽃잎 여러 장이 다닥다닥 붙은 달걀 지짐 모양의 꽃 잔치다. 

구절초는 매년 이맘때 산야를 지나치면 흔히 눈에 들어오는 들꽃이다.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지만, 은근히 마음을 당긴다. 산사가 품은 구절초에 마음이 이끌려 먼 길 나섰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애국가 3절의 첫 소절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주 쾌청한 날씨에 흥이 솟았다.

산사 입구에서부터 맞이하는 하얀 향기 따라 걷는다. 하얀 꽃으로 둘러싸인 극락보전이 보인다. 경내의 용천문을 통과하여 산사 앞에 선다. 위에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아래에선 새하얀 구절초가 산사를 호위하듯 감싸고 있다. 

구절초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시집온 지 한참 지난 여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좋다는 건 다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찾아온 스님이 여인의 사정을 듣고 한 사찰을 일러 주었다. 그곳에서 마음을 다하여 치성을 드리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 했다. 여인은 그 길로 사찰을 찾아갔다. 사찰 주변엔 하얀 구절초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여인은 하얀 구절초꽃처럼 마음을 비우고 치성을 올렸다. 사찰 내의 약수로 공양을 짓고, 구절초 꽃잎을 달인 차를 마시며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여인의 정성이 하늘에 닿은 걸까. 구절초의 영험일까. 여인의 몸에 새 생명이 찾아들었다. 구절초가 불임증을 비롯한 부인병에 효험이 있다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듯하다. 몸과 마음의 건강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구룡사 극락보전을 지나 구절암으로 향한다. 구절암으로 향하는 길 주변이 온통 구절초다. 이 길을 사색의 길이라 한다. 구절산승 진명스님의 ‘사색의 길’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가고 있다 계속 가고 있다.

끝이 없는 그곳으로

그러나 그곳은 쉴 곳이 없다.

우리 사색의 길에서 함께 자신을 만나보자

休. 休. 休

인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닦지 않을 것인가.’     

하얀 꽃을 벗 삼아 쉬엄쉬엄 걷는다. 군데군데 넓적한 바위 위엔 누군가의 염원이 층층이 하늘에 닿을세라 높다랗다. 정성껏 올려진 돌탑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다. 그리고 깍듯하게 고개 숙여야 할 것만 같아 그리한다. 산들바람이 분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약간의 경사가 힘겨워 잠시 멈춰 바람을 맞는다. 休, 진명스님의 쉼을 되씹는다. 

‘休. 休. 休’

여행의 묘미가 이것이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꽃밭이 눈앞에 펼쳐있고, 산새 소리가 바람 타고 흐른다. 마음 안의 찌꺼기가 함께 흘러가 버린 듯 개운하다. 

쉼 후 다시 꽃길을 걷는다. 십여 분 더 오르니 구절암이다. 소박한 암자에 올라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다. 계절은 가을인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설경이다. 하얀 꽃눈이 내려 산야를 뒤덮고 있는 모습이다. 

구절초는 처음 피었을 땐 연분홍빛을 띠다가 하얀 꽃으로 활짝 피어난다. 이 꽃에도 사연이 없을 리 없다. 옥황상제의 수발을 들던 선녀가 있었다. 그 선녀는 꽃 가꾸기에 빠져서 옥황상제 수발에 소홀했다. 화가 난 옥황상제가 그녀를 지상으로 쫓아냈다. 지상으로 쫓겨난 선녀는 착한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잘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을 못된 원님의 탐욕으로 선녀는 병을 얻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그 이듬해부터 그녀가 천상으로 돌아간 구월이 되면 그녀가 살던 집 주변에 하얀 꽃이 자욱하게 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 꽃을 천상의 꽃 구절초라 불렀다고 한다는 설이다. 

하늘이 맑고 푸르니 구절초가 맘껏 빛을 발한다. 선녀의 날개옷만큼이나 하얀 꽃이다. 오늘은 왠지 내 마음도 하얘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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