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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19. 2024

여기, 그 곳

미로미로(迷路美路)

해안 길 벽면을 따라 눈길이 멈춘다. 세월의 무게를 떠받친 절벽 위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군데군데 무너진 벼랑을 콘크리트 벽으로 단단히 여미었다. 피난민들이 아슬아슬한 삶을 꾸려간 흔적이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벼랑 끝자락의 삶은 어땠을까.

해안 길에서 마을로 이어진 길게 난 계단이 여럿이다. 아래에서 가파르게 연결된 계단을 올려다보며 숨부터 고른다. 피아노 건반을 밟듯 한발 두발 디딘다. 끝인가 싶었는데 또 계단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쉼 없이 오른다.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 계단을 숱하게 오르내렸을 사람들의 비탈진 삶으로 들어가 본다. 

계단 끝자락에 올라서니 가슴이 탁 트인다. 탁 트인 전망에 마파람이 덤으로 안긴다. 바다 건너 저편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올라선 빌딩 숲이 아이러니다. 빌딩 숲을 배경 삼아 한량없이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연 깊은 애환의 세월을 몸으로 휘감은 바다가 아닌가. 거센 폭풍우로 맞서고 잔잔한 파도로 토닥이던 날들이 까마득하다.

절벽 위로 아슬아슬해 보였던 자그마한 마을이 나지막이 모습을 드러낸다. 올망졸망 늘어선 집이 갯바위에 다닥다닥 사이좋게 달라붙은 따개비 같다. 세차게 부딪치는 파도에 굴하지 않으려고 따개비처럼 삶의 기둥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용쓰지 않았을까. 살아남기 위해 따개비의 부착력만큼이나 강한 의지로 억척스레 삶을 이끌어왔을 이들의 발자취를 느낀다. 

지붕과 지붕이 맞닿은 집 사이로 골목길이 이어진다. 내 한 몸 지나다닐 정도다. 골목 높이로 나란히 난 창으로 안방이 내려다보인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온다. 고개만 돌리면 옆집이고 아랫집이고 윗집이다. 비밀이란 게 있었을까. 어쩌다 멀건 고깃국이라도 끓이면 온 동네의 코끝이 모여든다. 삶이 마땅찮아 티격태격 부부싸움이라도 할라치면 온 동네 귀가 쫑긋한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다. 해야 할 것은 많은데 갖춰진 것이 없다. 무엇이라도 해서 식구들 끼니 해결은 해야 했다. 궁여지책으로 닭을 기르고 돼지를 키워 자녀들 학교에도 보내고 끼니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냈겠다. 한 점의 고기보다는 달걀을 얻고 새끼돼지를 키워 이룰 꿈이 더 컸지 않았을까. 바다가 잔잔해지면 바다로 나가 조개를 줍고 물고기도 잡았겠다.

깊숙이 들어가니 막다른 골목, 돌아서서 나오니 아까 그 자리다. 크지 않은 마을에 여러 갈래의 샛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계단을 오르고 골목을 돌고 또 계단을 오른다. 종일 헤매어도 그 자리를 맴돌고 있는 느낌. 그들의 삶도 미로였을 것이다.

곱게 단장된 계단 위에 그려진 꽃다발이 아름답다. 꽃다발을 쥔 듯이 각도를 맞춰 잡고 프러포즈하는 장면을 연출하게 되어 있다. 사랑을 안고 추억을 만들며 가뿐하게 오른다. 오래전 누군가는 이 계단을 오르며 짊어진 짐의 무게만큼 삶이 두둑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간절히 바라고 두드리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가만히 있어도 세월은 흐르는 법. 힘겨운 삶의 두께만큼이나 세월의 더께가 두껍다. 어떤 이는 징글징글했던 삶의 질곡을 벗어나고 싶어 떠난다. 어떤 이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역사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 무던히 지키고 있다. 각자의 삶의 무게가 다르듯 삶의 방식 또한 다르다.

삶도 미로와 같다. 직선으로 달리다 막다른 골목에서 멈추고, 곡선을 따라 돌다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멀미를 일으키고,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길 위에서 스무고개 풀 듯 풀고, 어지럽게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 위에서 망설이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늘 출구를 찾는 게 삶이다.

비슷한 세대를 살아온 부모님의 삶을 떠올린다. 결코, 녹록지 않은 삶이었다. 비탈밭을 일구어 담배와 고추를 심고, 산기슭 계곡을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뿐이 아니다. 집안에는 누에를 치고, 벌을 치고, 닭을 키우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마다하지 않았다. 보릿고개를 넘으며 고된 삶을 개간한 흔적은 우리네 땅 어디에도 남아 있다.

예전엔 이송도라 불렸고 지금은 흰여울이라 불린다. 흰여울은‘흰여울문화마을’이란 이름으로 거듭났다. 부산의 봉래산 기슭에서 굽이쳐 내리는 물줄기가 마치 흰 눈이 내리는 것과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물여울처럼 흘러온 세월 속에 그들이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아픔의 역사에 덧칠을 입힌 미학이 방문객의 가슴에서 승화하기를 바란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본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스친다. 풋풋한 인생이 해안가를 거닌다. 미로迷路 같은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 널따란 해안의 미로美路가 환하다. 각다분했던 날들의 기억쯤은 접어두고 싶다. 

미로迷路 같은 삶 속에서 미로美路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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