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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Oct 19. 2024

여기, 그곳

연심, 회연 뜰에 피다

누구를 향한 몸짓인가. 하얀 꽃망울이 수줍게 몸을 비튼다. 노르스름한 꽃술 안으로 봄빛 한가득 머금고 방싯거린다. 쭉쭉 뻗은 가지 따라 피워낸 단아하면서도 위엄 있는 품새가 고혹적이다. 다소곳한 손짓에 이끌리듯 따라간다. 

회연서원의 봄이 백매화 향기로 그득하다. 한강 정구 선생이 심은 백 그루의 매화 중 아흔아홉 그루는 세월 속에 묻혀갔지만, 그들을 대신하는 또 다른 매화가 서원의 앞뜰과 담장을 수놓는다. 고즈넉한 서원의 운치와 어우러진 화조풍월(花鳥風月)에 취해본다.

회연서원은 한강 정구 선생이 학문적 기초를 닦고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서원 경내로 들어서니 사당과 강당, 그리고 동서재가 고색의 풍취를 자랑한다. 강당은 선생이 후진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회연초당의 옛터이며, 선생의 문집판인『심경발휘』가 보관되어 있다. 반듯하면서도 유려한 필체에서 담담한 선비의 아취(雅趣)가 느껴진다.

서원 안쪽으로 살짝 돌아가니 숭모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선생의 저서 및 문집의 각종 판각을 비롯하여 유물과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선생은 경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능통한 대학자이자 문장가였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대부분 소실되고 소량만 전해진다니, 마치 내 역사를 잃어버린 양 안타깝다.

선생의 초상화 앞에 멈춰 섰다. 인물이 훤했다. 과연 뭇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을만했다. 학식과 덕망을 겸비하고도 인물까지 더했으니 오죽했으랴. 어쩌면 숱한 여인들의 발길이 서원 주변을 서성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강 선생은 매화에도 애착이 많았다. 백매원을 만들어 백 그루의 매화를 심어 가꾸었는데, 지금은 오직 한 그루만 남았다. 그 매화나무에는 ‘한강매’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봄의 정취 속에서 어김없이 맑은 꽃을 피우고 있다. 선생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매무새를 정돈하고 그 앞에 서보니 기분이 묘하다. 금방이라도 하얀 도포 자락 들어 올려 손을 내밀며 반길 것만 같다.

근방에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몇 그루의 나무에도 같은 팻말이 붙어있다.

“이 매화도 순종 한강매인가요?”

“이건 한강매라 할 수 없습니다. 문중에서 한강매라 칭하고 있긴 하지만 현재 한강매는 딱 한 그루뿐입니다.”

원예를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해설사의 설명에 귀가 번쩍 뜨인다. 벌이나 나비 또는 바람에 의해 수정된 씨앗으로 번식한 매화는 순종이 될 수 없단다. 그래서 한강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구한 나날 동안 한 자리를 지켜 온 한 그루의 한강매에 다시 시선이 머문다. 사연 많은 세월을 버텨 온 흔적이 역력하다. 

매화에 서린 넋을 쫓다 보니 어느새 봉비암이다. 봉비암은 봉비연(鳳飛淵)에서 유래되었는데, 봉비연은 봉비가 춤을 추다가 돌연 사라져 돌아오지 못한 곳이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사방을 둘러본다. 기암절벽 아래로 펼쳐진 대가천은 이들의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봉비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한강 선생의 학식과 인품을 흠모하였다. 그의 곁이면 어디든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처지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없는 그곳은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그의 손길이 닿는 매화가 되고 싶었다. 그를 향한 그리움이 그의 뼛속으로 스며들어 싹이 트고 꽃이 되어 피기를 원했다.

매화 꽃비 찬란한 날, 백매원 뒤뜰에서는 연회가 무르익고 있었다.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그녀가 춤을 추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춤성으로 흘러내렸다. 손끝에 그를 두었고 눈빛에 그를 담았다. 함께 가지 못하는 그의 애달픈 마음이 그녀의 가냘픈 몸짓 안에서 설움으로 배어났다. 

어둠이 깔렸다. 춤을 추던 매화 꽃잎은 뜰 아래로 내려앉았다. 흥도 가라앉고 연회는 갈무리되고 있었다. 그는 떠나고 빈자리만 휑하였다. 나비처럼 나풀거리던 그녀의 몸이 매화 꽃잎 떨어지듯 연당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더는 그녀의 춤사위를 볼 수 없었다.

이듬해부터, 매화가 소보록하게 핀 백매원 뜰에 나비가 제집인 양 날아들었다. 나비는 천년을 살 것처럼 매화에 마음을 쏟았다. 나비의 연정은 식을 줄 모르는데 매화의 향기는 사그라지고 있었다. 해가 지날수록 매화나무의 잎이 마르고 생기가 빠지며 조금씩 시들어 갔다. 나비는 아흔아홉의 매화를 잃는 아픔을 견뎌내야 했다.

마지막 딱 한 그루, 그를 본 것인가. 나비는 농염한 자태로 날개를 팔랑거렸다. 선비의 기품을 물씬 풍기며 그가 서원 뜰을 거닐고 있다. 얼마나 고대했던 날인가. 이날만을 위하여 온 몸을 던졌지 않았던가. 억겁의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 몽실한 바람이 매화 가지를 흔들었다. 백 그루의 매화가 바람을 탔다. 

한 여인의 넋을 생각하며 회연 뜰을 걷는다. 다시 매화가 핀 뜰에 머물러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꽃으로 피고 그 향기는 매혹적이다. 피었으되 홀로 피었다가 홀연 물속으로 져버린, 그 연정에 연민이 밀려와 짠하면서 아프다.

매화는 한 번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이 아니다. 매년 때를 잊지 않고 고아(高雅)하게 피어난다. 하물며, 오랜 그리움이야 어떠하랴. 금방 피었다가 져버릴 연심(戀心)이 아니기에 그 애틋함이 날로 더해간다. 행여 늦장이라도 부리면 보고 싶은 임을 만나지 못할까 봐 일찌감치 서두르는 것이리라. 이른 봄에 얹힌 바람이 꽃잎을 스쳐 간다.

봉비의 넋이려나. 매화 한 닢 살포시 내려앉는다. 사모하던 임이 깃든 한강매를 지키며, 나비 되어 하늘거리다 드디어 그의 꽃이 되었나. 사백여 년 그의 곁을 맴돌던 넋, 그녀가 방시레 웃는다.

하얗게 피어난 여심(女心)이 향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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