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해
단단해지고 순해지는 달리기를 시작한 지 197일째다. 하루도 빠짐없이 10km를 달렸다. 비가 와도, 몸이 무거워도, 전날 밤이 너무 길었어도 아침이 되면 신발 끈을 묶었다. 풀코스 마라톤을 세 번 완주했다. 42.195킬로미터. 그 숫자가 이제는 두렵지 않다. 처음 출발선에 섰을 때의 그 떨림이 지금은 설렘으로 바뀌었다. 매일 10km 달리기를 시작하기 197일 전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몸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5km만 뛰어도 숨이 턱까지 찼는데, 지금은 10km가 그냥 ‘오늘 할 일’이 됐다. 근육이 붙었고, 호흡이 깊어졌고, 아침이 가벼워졌다. 계단을 오를 때 무릎이 덜 시리고, 오래 서 있어도 예전처럼 쉽게 지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달리기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단단해질수록, 나는 점점 순해지고 있었다. 풀코스를 달릴 때의 일이다. 30km를 넘기자 몸이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허벅지가 굳어오고, 발바닥이 뜨거워지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그냥 걸어도 돼.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충분해.’ 나는 그 목소리에 화내지 않았다. 억지로 이겨내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다음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게 전부였다. 그게 바로 순해지는 일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의 나는 한계를 만나면 싸웠다. 이겨야 한다고, 절대 지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강하게. 그 말들이 내 안에서 채찍처럼 울렸다. 그런데 매일 달리다 보니 한계는 싸워서 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한계는 그냥 거기 있다.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과 나란히 달리는 것뿐이다. 한계를 적으로 보지 않고, 그냥 함께 달리는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달리기에서 배운 가장 큰 것이었다. 몸의 한계를 받아들이자, 마음도 조금 낮아졌다. 남보다 빠르지 않아도 됐다. 누군가의 기록과 내 기록을 굳이 나란히 놓지 않아도 됐다. 마라톤 완주 후 SNS에 올라오는 타인의 기록을 보며 괜히 쪼그라들던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 그냥 사라졌다. 나는 그냥 오늘의 나로, 오늘의 10km를 달리면 그뿐이었다. 비교는 달리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됐다. 오히려 방해가 됐다. 그래서 내려놓았다.
그러자 삶도 조금씩 단순해졌다. 달리기는 단순한 행위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고,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간다. 음악이 없어도 되고,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된다. 심지어 생각이 없어도 된다. 그냥 달리면 된다. 처음에는 그 단순함이 오히려 불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뭔가 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다. 그런데 달리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단순한 것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를 알게 됐다. 단순한 삶이란 아무것도 없는 삶이 아니다.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덜어낸 삶이다. 달리기를 하면서 나는 매일 아침 그 연습을 한다. 오늘 달릴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 단순한 결단이 하루를 깔끔하게 시작하게 만들고, 그 깔끔함이 하루 전체로 번져나간다. 불필요한 감정을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어진다. 누군가에게 서운했던 일도, 잘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일도, 10km를 달리고 나면 조금 작아져 있다. 땀과 함께 흘러간 것들이다.
단단해지고 순해지는 것. 이 두 가지가 반대말처럼 느껴질 수 있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 거칠어져야 할 것 같은데, 달리기는 내게 반대로 가르쳤다. 진짜 강한 사람은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자기 한계를 알고, 그것을 미워하지 않으며, 단순하게 오늘 자기 속도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복잡한 것들을 억지로 단순하게 만들려 하지 않고, 그냥 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순해졌다. 삶의 군더더기들이 달리는 동안 조용히 떨어져 나갔다.
단단해지고 순해지는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단순한 삶이 있다. 나는 매일 아침 신발 끈을 묶으면서 이 문장을 배우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한 걸음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