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과 생동감 사이

인생사

by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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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세상의 소음이 일시에 걷힌다. 오직 내 숨소리와 심장 박동만이 남는 그 새벽녘 고요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와 마주한다. 처음에는 이 소리가 낯설고 고통스러웠고 거칠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그 순간, 나는 수없이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달리기가 내게 가장 진지하게 말을 걸어오는 때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달리기는 언제나 솔직하다. 오늘 몸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 마음이 어디쯤에서 흔들리고 있는지,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핑계도, 변명도 통하지 않는 그 길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민낯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마라톤 대회를 참가해 본 러너들은 공감할 것이다. 대회장에서 달리다 보면 “어휴, 마라톤은 진짜 정직한 운동이네. 딱 연습한 만큼만 결과가 나오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 말을 들으며 주위에 달리는 러너들은 공감이라도 한다는 듯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달리기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달리다가 힘들면 그냥 멈추면 되지 않아?” 맞는 말이다. 언제든지 멈출 수 있다. 멈출 수 있다고 해서 멈추고 싶을 때마다 멈춘다면 달리기는 그냥 운동일뿐이다. 내가 달리면서 배운 것은 ‘무조건 참고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 참아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법이었다. 페이스가 무너질 때, 나는 속도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나 발걸음만은 멈추지 않는다. ‘천천히 달려도 되니까 걷지만 말자.’ 포기하지 않되, 방식은 바꾼다. 이것이 내가 오늘로 199일 연속 10km를 달리는 길 위에서 깨달은 인내심의 본질이다. 스스로를 부서지지 않을 만큼 조절하면서도, 그 길의 끝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가는 것을 배웠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을 억지로 버텨낸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지혜, 그러면서도 가야 할 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용기. 그것이 진짜 인내다. 무턱대고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릴 필요가 없다. 달리기 선수도 아니고 매일 쉼 없이 달릴 수도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힘겹게 달리는 그 안에서, 어느 순간 살아있다는 감각이 불현듯 밀려왔다.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오는 그 순간, 온몸의 세포가 일제히 깨어났다. 생동감을 느낀 것이다. 고통과 쾌감이 한 자리에 뒤엉키는 그 기묘한 교차점은 짜릿하기도 하고 찌릿하기도 하다. 달리기는 그 감각을 내게 선물해 주었다.


매일 10km를 달리다 보면, 어떤 날은 발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볍고(실제로 구름 위를 걸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떤 날은 아스팔트에 발이 달라붙는 것처럼 무겁다.(아스팔트에 발이 달라붙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날 모두 달리고 나면 같은 감각이 남는다. 내가 오늘 살았다는 것.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이 하루를 온몸으로 살아냈다는 것을 느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한다.


그 생동감은 결코 순탄한 날에 찾아오지 않는다. 포기하고 싶던 고비를 넘어선 뒤에야, 조용히 그 자리에 깃든다. 그래서 인내심과 생동감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인내심의 터널을 통과한 자만이, 그 끝에서 진짜 생동감을 마주할 수 있다. ‘인내심과 생동감 사이’라는 말을 처음 떠올렸을 때, 나는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아홉 글자 안에 ‘인생사’가 있었다. 인생사(人生史)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온 과정이나 살면서 겪어 온 일’이다.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내심과 생동감, 그 사이 어딘가에 인생이 자리하고 있다. 무조건 버티기만 하는 삶은 고통이고, 아무것도 견디지 않으려는 삶은 가볍다. 그 둘 사이, 버텨야 할 것은 기꺼이 버티고 느껴야 할 것은 온몸으로 느끼는 그 균형 위에서, 비로소 인생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돌아보면, 내 삶의 많은 순간이 달리기를 닮아 있었다. 경찰관으로 10년을 살면서, 나는 수없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마주했다. 학교 폭력 현장에서, 가정법원 위탁보호위원 활동을 하면서, 나는 무너지는 아이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 나는 그냥 달렸다.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달리는 동안만큼은 그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내달렸다.


인내심이란 결승선을 향해 이를 악물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한 발을 내딛는 것이고, 생동감이란 특별한 날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땀 흘리는 평범한 아침마다 조용히 스며드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인생이란, 그 두 가지를 오가면서도 끝내 길을 잃지 않는 여정이라는 것까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버텨야 하는 것’과 ‘즐겨야 하는 것’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하지만 달리기는 그 둘이 사실 하나임을 가르쳐주었다. 버티는 순간에도 살아있음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기꺼이 버티는 것도 달리기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나는 오늘도 신발 끈을 묶는다. 완벽하지 않은 몸으로, 완벽하지 않은 날씨 속에서. 그래도 달린다. 인내심과 생동감 사이, 그 길 위에서만 내가 진짜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나에게 인생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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