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내가 보네
우리 집 평일 루틴은 둘째 딸 어린이집 16:20 하원, 첫째 아들 16:40 태권도 픽업 후 귀가하여 저녁 식사를 한다. 17:30 경이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보드게임을 한 뒤 18:00경 아파트 놀이터로 향한다. 초여름 날씨임에도 저녁에는 제법 선선하다. 이 시간 놀이터에는 아버님들 보다는 어머님들이 더 많다. 어머님들 중에서도 아이들과 같이 뛰어노는 에너지 넘치는 어머님들도 있고, 벤치에 앉아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어머님들도 있으며, 어머님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일부러 어머님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려고 한 것이 아닌데 우연히 둘째 딸 그네를 밀어주던 중, 어머님 한 분께서 속상해하며 "아니 남편하고 똑같이 나도 일하는데 밥도 내가 하고, 애도 내가 보네"라고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세 분의 어머님들도 격하게 공감하는 제스처를 보냈다. 물개박수와 함께.
순간 놀이터를 둘러보았는데 하필 오늘따라 어머님들이 많이 계셨고, 아빠는 나 혼자였다. 마치 나한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소극적으로 밀던 그네를 갑자기 있는 힘껏 밀었다. 뭔가 더 분발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과 놀면서도 곱씹어 생각을 해봤다. 아내도 다른 어머님들의 말씀과 같은 생각이 들게끔 행동했던 터라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를 열었다. 평소 "요리 빼고 다한다."라는 마음이었는데 심지어 지금 우리 집 상황은 아내가 일을 하고 나는 2개월째 육아휴직 중이다. 뭐라도 해야 했다. 마침 대왕토마토와 양파가 많았다. 얼른 유튜브를 틀어 토마토로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찾았다. 세상에 토마토 하나만 쳤는데도 이렇게나 많은 레시피가 나온다니.
지금까지 나는 아주 쉬운 결혼 생활, 육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소위 말해서 '꿀 빠는 인생'을 살았던 셈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내는 나에게 "똑같이 일하는데 밥도 내가 하고, 애도 나만 보네"라고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감사했다. 토마토와 양파를 볶고, 삶은 계란과 함께 각종 소스들을 듬뿍 넣어서 소분하여 냉장고에 넣어놨다. 아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저녁상을 세팅해 놨다. 요리에 자신이 없고, 라면 하나 겨우 끊이는 나로서는 아내가 "싱겁다. 짜다. 간이 안 맞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오 완전 내 스타일, 맨날도 먹을 수 있겠다."라고 퇴근하고 와서 피곤했을 텐데 말까지 예쁘게 해 주었다. 앞으로 종종 아니 자주 주방에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올해는 내가 휴직인 상태이니 이참에 기본적인 밑반찬들이라도 도전해 봐야겠다.
지금까지 너무 나만 '꿀을 빨았다.' 이제는 아내와 공평하게 '꿀을 빨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