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과 의리를 갖춘 천재 작가 김시습(金時習)
의지대로 살다간 야인
온 시야를 붉게 물들이는 노을이 가득한 저녁이다. 이 시간만 되면 괜시리 설레어 서녘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가슴이 뛴다. 아마도 저무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리라. 또한 저물어 가는 삶에 대한 동병상련의 마음이겠지. 지난 삶을 돌아보고 그래도 아직 남은 삶을 그려보며 현재를 다짐하는 자화상이 그려지는 건 인지상정이리라. 그것이 한 편의 시이든 그림이든 혹은 그저 끄적이는 몇 문장이든.
오늘은 유달리 와 닿은 조선전기 천재 작가 김시습의 자화상 같은 한시를 돌아본다.
我生(아생): 내가 태어나서
-매월당 김시습
我生旣爲人(아생기위인) : 내가 태어나서 이미 사람으로 되었으니
胡不盡人道(호불진인도) : 어찌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않으리오.
少歲事名利(소세사명리) : 젊어서는 명리를 일삼았지만
壯年行顚倒(장년행전도) : 장년이 되어서는 뒤바뀐 세상에 좌절하였네.
靜思縱大恧(정사종대뉵) : 가만히 생각하면 크게 부끄러우나
不能悟於早(불능오어조) : 어려서 일찍 깨닫지 못한 탓이네
後悔難可追(후회난가추) : 후회해도 돌이키기 어려우니
寤擗甚如擣(오벽심여도) : 깨달음에 가슴치기를 방아 찧듯 하네.
況未盡忠孝(황미진충효) : 하물며 충효도 다하지 못하였으니
此外何求討(차외하구토) : 이외에 무엇을 구하고 찾겠는가.
生爲一罪人(생위일죄인) : 살아서는 한 죄인이 되었으니
死作窮鬼了(사작궁귀료) : 죽어서는 궁색한 귀신이 되리라.
更復騰虛名(갱부등허명) : 다시 헛된 이름만 올라갔으니
反顧增憂悶(반고증우민) : 돌아보면 근심과 번민만 늘었구나.
百歲標余壙(백세표여광) : 백년 후에 내 무덤에 표할 때는
當書夢死老(당서몽사로) : 마땅히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주시게.
庶幾得我心(서기득아심) : 행여나 내 마음 아는 이 있다면
千載知懷抱(천재지회포) : 천년 뒤에 내 속마음 알 수 있기를.
3세에 유모가 보리를 맷돌에 돌리는 장면을 보고 이를 시로 창작했다는 그는 이미 신동으로 소문이 났으며, 5세 때 세종은 그를 궁궐로 불러들인다. 세종의 요구에 척척 시를 짓는 모습에 기특해하며 비단 50필을 하사하고 후일 인재로 성장하기를 당부한다. 단 하사한 비단을 혼자 힘으로 들고 가도록 하자, 허리에 묶어 끌고 왔다 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김오세'라 부르게 된다. 5세의 어린 나이에 참 영특하고 당돌하다. 이런 그의 기질은 21세에 인생을 바꾸어 놓게 한다. 다름 아닌 '계유정난'이 발발한 것이다. 수양대군이 신하들에 좌지우지되던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대의적 옳고 그름을 떠나 신하로서 김시습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사흘을 통곡하며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읽던 모든 서책을 불태우고선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 출가한다. 이를 보아도 그의 대쪽 같은 성정을 알 수 있다. 또한 목숨으로 끝까지 세조에 반대한 사육신들이 모진 고문과 참혹한 처형으로 노량진에 버려졌을 때 아무도 감히 두려워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으나 바로 김시습이 달려가 수습 후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전해지는 노량진의 '사육신 묘'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역시 세상을 등지며 세조에 협조하지 않은 생육신으로 살아간다. 그의 긴 유랑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중국의 전등 신화를 모방했다고도 하나 그만의 개성적인 구성과 문체가 잘 드러나는 주옥같은 작품이다. 30대가 된 김시습이 경주로 내려가 '매월당'이라는 호를 짓고 금오산에 칩거하며 창작한 전기체 소설이다. 지어진 편수는 더 있다하나 전해지기는 5편이다. 죽음을 초월한 이생과 최랑의 애절한 러브스토리인 <이생규장전>, 부처와 저포 내기로 아리따운 여인과 인연을 맺으나 죽은 처녀의 환신이었고, 이별 후 지리산에서 칩거한 양생 이야기인 <만복사저포기>, 글재주가 뛰어난 한생이 용왕의 초대로 용궁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 후 극진한 대우를 받고 돌아온다는 <용궁부연록>, 대동강 부벽루에서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는 시를 읊으며 수천 년 전 기자의 후손인 아리따운 기씨녀를 만나 서로 사랑을 나누다 헤어진다는 <취유부벽정기>, 몽유 구조로 작가의 철학 사상의 집약이라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재주가 뛰어나나 과거에 실패하던 박생이 꿈에 염부주(염라대왕)에게 초대되어 사상적 담론을 겨루며 인정받는 <남염부주지>가 그 5편이다.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자가재인의 뛰어난 인물들이며,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삶과 거리가 먼 신비한 세계를 다루고 있는 전기(傳奇) 소설로이는 현실 속 제도나 인습, 혹은 운명까지도 인간의 의지로 강렬하게 대결하고자 하는 작가의 신념을 보여준다.
시와 문장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던 김시습은 부여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영정각 안에 그의 초상화가 전해오고 있다 한다. 평생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꿈꾸는 대로, 의지대로 살아간 그의 삶이 부럽기까지 한다.
백년 후 묘비명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쓴다면 회환이 좀 덜하려나. 나의 속마음이야 천 년 뒤 누군가는 알아주기도 하겠지라 흘려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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