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따스한 어느 봄날

-할머니의 주름도 그리운 날

by 다담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왼편에 조그마한 수도 시설이 있다. 파랑 호수가 늘어진 수도는 바깥놀이 후 더러워진 신발이며 발을 대충 씻는 곳이다. 수도 옆으로 할머니가 정성껏 가꾸시는 화단에는 봄햇살 가득 머금은 채 제법 탐스런 꽃들로 가득하다. 뒷마당의 텃밭에 가득한 온갖 푸성귀나 채소투성이와는 달리 앞마당 화단에는 예쁜 꽃들이 가득하여 나역시 좋아하는 곳이다. 따스한 봄햇살 아래 아기자기 피어난 수선화도, 패랭이꽃도, 붓꽃도 늘 시선을 끈다. 어린 눈에 어느 동화속 꽃나라의 공주님들처럼 그렇게 예뻐보였다. 가꾸는 이의 정성과 손길에 천지가 감흥한다고, 이 꽃밭은 할머니의 애정이 가득한 곳이다.

옛기와집이었던 외가는 화단을 끼고 돌면 대청마루가 펼쳐진다. 어린 꼬맹이인 난 제힘으로 올라가기조차 버거운 높이의 추억의 대청마루는 늘 반질반질 잘 닦여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늘상 할머니는 대청마루에서 걸레질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오늘따라 햇살 가득 내려앉은 마루에 앉아 걸레질하시며 더 따스한 미소로 마당에 쪼그려 앉아 공기놀이하던 날 내려보시던 그 미소가 그립다.

햇살의 온기가 나른하게 감싸주던 어느 오후, 할머니는 마당 한켠 창가 아래 의자를 내어선 수줍은 미소 머금고 사진을 찍었다. 햇살 한 가닥 한가닥이 할머니를 비추니 꽃처럼 피어난 할머니는 주름살도 보이지 않고 꽃분홍 스웨터만큼 예뻤다. 그 때 그 시각, 그 봄 햇살 그리고 할머니의 미소는 추억의 감정으로 각인돼 잊혀지지 않는다. 깜박 졸다보니 한평생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렸다는 시인의 구절처럼 지금은 아득한 옛 추억의 현장이다.

나에게 봄햇살은 그리움이다.

아스라한 유년의 따스함으로 가슴 데워지는 그리움이다. 지금은 핢머니도, 외가도 지상엔 흔적이 사라져 하늘 우러러야 또렷해지는 그리움이다.

봄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잔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거리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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