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이별도 자연스럽게

장석남 시인의 詩를 읊으며

by 다담

사랑의 시작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썸부터 사랑일까, 고백이라도 해야 사랑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온통 그만 보이고 그를 위해 별도 달도 따 줄 수 있는 마음 정도는 되어야 사랑이라 할 수 있나. 과연 "난 너를 사랑해."라는 말은 언제 하는 것이 좋을까.
혹은 이 사랑이 끝났구나 하는 것은 어찌 알 수 있을까. 더 이상 두근거림이 없으면 사랑은 끝난 걸까. 그의 안부가, 하루가 궁금하지 않으면, 그의 문자를 슬쩍 읽씹하는 건 사랑의 끝을 알리는 징조인가. 헤어지자는 통보가 사랑의 끝인가, 미련없이 담담히 그의 이름을 부를 정도는 돼야 사랑이 끝난 걸까.

아름답고 섬세한 감정을 노래하여 신서정파라 불리는 장석남 시인의 배 시리즈로 대변되는 두 편의 시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멋드러진 답이 되리라 본다. 조건을 따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그 시작에서 바로 보여준다.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다


사랑이 어찌 계획대로 될 것인가, 조건을 따져 저울질한 사랑이 어찌 사랑일까. 그저 넋 놓고 앉아 있다가 소리없이, 어쩔 수 없이 시작되는 것이 사랑인 게지. 그와 함께 온 우주가, 구름과 빛과 시간이 나에게로 오는 것이 사랑이고, 온 가슴이 빛 속에 울렁이게 하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배를 밀며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 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 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 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 없이 밀려 들어오는 배여


이별이 아프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 이별이 나로 인한 것이든 그저 받아들인 것이든. 이별 역시 사랑처럼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슬픔과 허무함과 알 수 없는 후련함도 주는 이별.
이별 후 빈 가슴에 흉터는 남을 것이나 그래도 결국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다 또 빈 가슴에 훅 옛 사랑이 소리없이 밀려오기도 할 것이며.

결국 사랑도 이별도 자연스러운 것이니, 억지로 연결하지도 끊어내지도 말자. 자연스레 인연은 둘을 엮어 매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할 것이니 그것이 삶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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